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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되살려낸 독립운동가 15인 김구·안중근·유관순 등 색채 사진으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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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순기능이다. 인공지능(AI) 기술로 100여년 전 영웅들을 생생하게 소환했다. 낡은 흑백사진으로 만나보던 독립 영웅들을 선명하고 깨끗한 색채 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국가보훈처는 제104주년 3·1절을 맞아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의 낡은 흑백사진을 AI 기술을 활용해 깨끗한 색채 사진으로 복원했다.
이번 복원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 국민 자긍심의 원천인 독립정신을 널리 알리고 독립운동가의 공적과 주요 어록을 직접 확인함으로써 선열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획됐다.
흑백사진이 복원된 독립운동가는 김구, 김좌진, 베델, 송진우, 안중근, 안창호, 유관순, 윤동주, 윤봉길, 이승만, 이회영, 조소앙, 최재형, 한용운, 헐버트 등 15명이다. 사진은 AI 얼굴 복원기술(GFP-GAN), 안면 복원을 활용해 고해상도의 색채로 복원됐다.
복원 사진은 영상으로 제작돼 4월 11일까지 서울 광화문광장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대형 전광판을 통해 송출된다. 국가보훈처는 앞으로도 독립운동가들의 흑백 인물사진에 대한 색채 복원을 통해 후손 등에게 액자를 증정하고 영상으로 제작해 국민들에게 공유할 예정이다.

선수현 기자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김구(1876~1949)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령·주석 등을 역임했다. 한인애국단 의거를 주도하고 한국광복군을 창군했다.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
안중근(1879~1910) 교육사업과 의병운동을 전개하고 단지동맹을 결성했다. 1909년 10월 26일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성공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1902~1920) 1919년 서울에서 3·1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 말인가, 단장의 아픈 마음 쓸어버릴 길 없구나.”
김좌진(1889~1930) 대한광복회 부사령관으로 활약하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지도했다. 북로군정서 사령관으로서 1920년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나는 죽을지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민족을 구하게 하시오.”
베델(1872~1909) 1904년 영국 기자로 내한해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했다. 언론으로 일본의 경제침탈을 비판하고 국내외 독립운동을 보도했다.



“옥중에 갇힌 몸이 밤마다 잠 못 이루니 나라 근심에 상한 마음 몇몇 해나 쌓였던고.”
송진우(1890~1945) 일본 유학 후 1921년부터 <동아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언론운동을 전개하고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지원했다.



“낙망(落望)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안창호(1878~1938)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에 선출됐고 청년단체 흥사단을 조직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노동국 총판 및 내무총장 등으로 활동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윤동주(1917~1945) 연희전문학교에서 <서시> 등 민족시를 발표했다. 1942년 징병제 반대 시를 집필하는 등 민족문학 활동을 지속했다.



“사나이 뜻을 세워 집을 나가면 뜻을 이루지 않고서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으리라.”
윤봉길(1908~1932) 중국으로 망명해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에서 일본 수뇌부들에게 폭탄을 던져 독립의지를 드높였다.



“사람을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으니 하나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다.”
이승만(1875~1965)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추대됐다. 1941~45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서 외교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독립을 위해서는 먼저 백성을 깨우쳐야 한다.”
이회영(1867~1932) 1911년 만주에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과 무정부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삼균주의(三均主義)-정치·경제·교육의 균등제도와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의 호혜평등으로 민주국가 건설하자.”
조소앙(1887~1958) 1913년 동제사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임시정부의 정당인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삼균주의 강령을 기초했다.



“러시아 추위보다 나라를 잃은 나의 심장이 더 차갑다.”
최재형(1860~1920) 러시아 한인들을 보호하고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08년 항일단체 동의회를 조직하고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총장에 선출됐다.



“참된 평화는 반드시 자유를 함께해야 한다.”
한용운(1879~1944) 1919년 3·1운동에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참여했다. 민립대학기성회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했고 신간회 경성지회장으로 활동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헐버트(1863~1949) 잡지 <한국평론>을 창간해 일제 침략을 비판했다. 1907년 고종의 헤이그밀사 파견을 지원했다.

자료 국가보훈처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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