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와 헨델이 찾은 북부독일 프로테스탄트 음악의 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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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 해의 항구도시 뤼벡은 함부르크에서 북동쪽으로 약 60킬로미터에 위치한다. 뤼벡은 한때 서유럽과 스칸디나비아 및 러시아를 중계하던 한자(Hansa) 동맹의 중심도시였다. 뤼벡 시가지 입구 홀슈텐 대문 너머로는 시가지의 지붕선을 뚫고 나온 쌍둥이 첨탑이 보인다. 1310년에 봉헌된 성모 마리아 교회의 종탑으로 높이는 125미터로 19세기에 쾰른 대성당의 첨탑이 완공되기까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첨탑이었다.
한편 서양음악의 역사를 보면 바흐와 헨델은 성모 마리아 교회의 쌍둥이 첨탑처럼 우뚝 솟아있는 대음악가이다. 이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1685년 같은 해에 한 달 차이로 태어났고 출생지도 서로 그리 멀지 않은 아아제나흐와 할레이다.
그런데 이 두 대가는 평생 서로 만나본 적이 없다. 헨델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후 영국 런던에 정착하여 크게 유명세를 누린 반면, 바흐는 독일의 북부지역을 벗어난 적이 없다. 바흐가 가장 북쪽으로 간 곳이 바로 뤼벡인데, 성모 마리아 성당은 이 두 대가의 궤적이 서로 겹치는 곳이기도 하다.
성모 마리아 교회는 예로부터 오르간으로 유명하다. 뤼벡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폭격으로 이 교회를 포함 시가지의 5분의 1이 파괴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이 교회는 급속도로 복구되었다. 불타 없어진 옛 오르간 자리에는 지금은 1968년에 제작된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 오르간의 가장 긴 파이프는 자그마치 11미터나 된다. 이 거대한 오르간이 제작되기 300년 전인 1668년, 이 교회의 오르간 주자 자리에 덴마크의 헬싱외어에서 건너온 31세의 북스테후데(D. Buxtehude)가 임명되었다.
당시 이 교회는 북부 독일 프로테스탄트 음악의 요람이었다. 이곳 오르간 주자 자리는 지금으로 치면 세계적인 교향악단의 지휘자와 다름없었으니 당시 음악가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오르간 주자 자리를 맡으려면 전임자의 딸과 결혼해야 하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젊은 대가 북스테후데는 복도 많았다. 그의 전임자는 딸이 여럿 있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많았으니 말이다. 그는 툰더의 딸 중에서 미모가 가장 뛰어난 막내딸과 1668년에 결혼하고 오르간 주자의 자리를 물려받았으니 다른 음악가들이 몹시 부러워하는 행운아였던 셈이다.
북스테후데가 작곡한 오르간 음악은 극적이고 환상적이었고 그의 오르간 연주 실력은 신기에 가까웠기 때문에 모든 독일 음악가들이 꼭 한번 그의 연주를 듣고 싶어했다.
그는 전임자가 1646년부터 이 교회에서 목요일마다 개최하던 ‘저녁 음악회’(Abendmusiken)를 크리스마스 이전 다섯번 째 일요일 오후로 바꾸고 1673년부터는 대규모 행사로 확대했다.
이 음악회는 워낙 유명하여 이를 한번 보려고 독일 각지에서 음악가들이 몰려왔는데 그 중에는 20세의 청년 바흐도 있었다.
시골도시 아른슈타트에서 오르간 주자로 봉직하던 바흐는 1705년 10월, 4주간의 휴가를 얻어 약 400킬로미터나 되는 머나먼 길을 두발로 걸어서 왔던 것이다. 음악을 재생하는 기술이 없던 당시 직접 현장에서 음악을 듣는 수밖에 없었으니 별 도리가 없었다.
바흐는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북스테후데의 완벽한 연주와 장려한 음악을 깊게 맛보았다. 그는 이곳에서 이 교회의 오르간 주자 자리를 꿈꾸었고 북스테후데는 그의 실력을 알아보고는 자기의 후임이 되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단, 관례에 따라 북스테후데의 딸과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북스테후데의 딸은 나이도 바흐보다 10살 더 많은데다가 당시 남자들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정도로 매력이 없었다는 것. 게다가 바흐는 사촌 여동생 바르바라와 이미 깊은 사랑을 나누고 있던 상태였다.
어쨌든 바흐는 북스테후데의 음악에 빠져 무단결근도 아랑곳하지 않고 4주가 아니라 자그마치 4개월이나 뤼벡에서 체류한 후에 아른슈타트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의 앞에는 다시 머나먼 길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발걸음은 이전보다 훨씬 가벼웠을 것이다.
그것은 사랑하는 바르바라가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북스테후데의 작풍을 터득한 만족감이 더욱 그를 우쭐하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바흐는 북스테후데 작품을 반 이상 베껴갔다. 그는 뤼벡을 떠나 아른슈타트로 돌아간 다음 불후의 오르간 명곡 <토카타와 푸가 d단조 BWV565>를 작곡하게 된다.
한편 헨델도 성모 마리아 교회를 찾았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바흐와 헨델은 서로 만날 운명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당시 함부르크에서 활동하던 헨델은 북스테후데의 음악회를 보려고 왔는데 바흐가 오기 1년 전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헨델도 북스테후데의 후임자가 되기를 은근히 희망했다. 하지만 그의 딸과 결혼해야한다는 계약서를 읽고는 기겁하여 줄행랑치고 말았다.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culturebox@naver.com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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