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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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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와 푸른빛이 스미고 저며 드는 석양의 한남대교를 건넜다. 그러나 감탄할 새도 없이 차들이 쌩쌩 달려 고개 돌려 석양을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오늘도 널뛰듯 바쁜 하루를 보냈다. 아침 일찍 동사무소부터 시작해 도슨트(전시해설 가이드)로 잠시 일하고 있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 헨리베글린에 가 손님을 맞고 유튜브 촬영을 하고 경기 판교까지 운전해 미팅을 하고 다시 강남. 끊임없이 말을 뱉어냈고 찰나의 생각이 스쳐 지났으며 실망과 희망과 원망이 차례로 오갔다. 통장의 돈은 뭉텅이로 빠져나갔고 들어올 돈은 어디선가 막혀 있으며 살아낼 미래에 대한 불안과 살아온 생에 대한 후회, 그 중간 어디쯤에선가 나는 곡예사의 줄타기마냥 오늘을 간신히 버텨냈다.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오늘같이 몰아친 날은 차에서 쉽사리 내리질 못한다. 오늘의 말과 오늘의 사람들이 영국 작가 줄리언 오피의 그림같이 머릿속에 오갔다. 부자들은 가진 돈을 지키느라 낯빛이 어둡고 가난뱅이들은 내일 먹을 양식 때문에 마음이 어둡다. 내 친구의 아들은 막 연애를 시작해 얼굴에 홍조를 띠고 있고 친했던 동료 한 명은 삶이 비루하다며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청첩장과 부고장이 경쟁하듯 무시로 날아들며 태어나고 죽고 시작하고 끝내고 다치고 낫고 깨지고 이어지는 삶.
크게 기뻐할 일도 크게 슬퍼할 일도 없는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 아니, 생각해 보니 그렇지 않다. 서울 청담동 골목을 아슬아슬 피해가며 외제차를 긁지 않았고 대형트럭이 난무하는 고속도로를 무난히 넘나들었으며, 집에 가져온 빈티지 스탠드 조명이 깨지지 않고 무사히 안착했다. 점심을 굶을 뻔했으나 손님이 사온 김밥으로 끼니를 때울 수 있었고 포도즙 한 박스와 가방을 선물로 받았으며 두 아들의 안위를 짧게나마 확인했고 남편의 복잡한 심부름에 짜증내지 않았다.
청담동 좁은 골목을 지나다 외제차를 긁으면 손해가 얼마나 막심하고 일이 복잡해지겠는가. 쌩쌩 고속도로에서 자칫 한눈팔아 대형트럭이 스치기라도 했다면 아찔한 일이다. 큰 맘 먹고 구입한 이탈리아 조명을 뒷자리에 겨우 실었는데 갓등이라도 부딪혀 깨졌더라면 얼마나 속이 쓰릴 것인가. 시간이 없어 점심을 굶었더라면 배고픈데 일 시킨다며 남편의 심부름에 왕짜증을 부렸을 것이다. 짜증은 싸움으로 번져 얼굴에 화가 치밀어 사람들에게 날 선 말들을 쏟아냈을 수도 있다.
오늘은 그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은 몹시, 매우, 퍽이나 행운의 날이었다. 더 좋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은 평범한 하루가 아니라 살얼음판 같은 생을 지나며 불행할 수 있는 수만 가지 일들이 일어나지 않은 기적의 날이었다.
빈티지 스탠드 조명에 불을 밝혔다. 불빛이 유난히 예쁘다. 이 불빛 아래 앉기까지 감사와 축복과 기적이 내게 쏟아진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윤영미
SBS 아나운서 출신으로 최초의 여성 프로야구 캐스터다. 현재는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산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통해 제주 무모한집을 소개하며 뉴미디어를 향해 순항 중인 열정의 소유자.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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