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분갈이하다 배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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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추운 날이었다. 그날은 모처럼 하루를 몽땅 쉴 수 있는 날이었고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 조금 고민하다가 화분을 안고 집을 나섰다. 오늘 분갈이를 해주지 않으면 이 식물이 영영 죽어버릴 것 같다는 이상한 확신이 내 등을 떠밀었다. 동생이 생일선물로 받아온 이름 모를 식물은 해도 잘 안 들고 관심 주는 사람 하나 없는 우리 집에서 기특하게도 1년 넘게 살아남았다.
벽지나 장판처럼 있지만 없는 듯 존재하던 화분은 어느 날 갑자기 무성해진 이파리로, 휘어진 줄기로, 고양이에게 뜯겨 장판을 구르는 잔가지로 ‘나 아직 여기에 살아 있다’고 신호를 보내왔다. 그럴 때면 벌떡 일어나 물이나 한 그릇 떠다 붓는 것으로 찝찝한 죄책감을 씻어버렸다.
“어차피 내 화분이 아닌데…. 이 집에서 나만 너를 챙겨주는데 이 정도면 잘하는 거 아닌가?”
추위를 뚫고 도착한 화원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나는 사장님께 타박을 맞았다.
“아니 언니는 그렇게 따뜻하게 꽁꽁 싸 입고 얘는 이렇게 춥게 데려오면 어떡해?!”
사장님이 연신 “어머 불쌍해라”를 되뇌며 식물의 이파리며 줄기를 꼼꼼히 살피는 동안 나는 조마조마했다. 식물과 사장님은 왠지 말이 통할 것만 같았고 그렇다면 식물은 분명 그에게 다 말할 것이었다. 쟤가 나를 방치했다고. 물도 제대로 안 줬고 보다시피 분갈이도 제때 안해 괴롭게 했다고.
“언니가 키우는 거예요?”
뜨끔했다. 너무 뜨끔해서 마스크 속에 표정을 숨기고 나도 모르게 도리질을 했다.
“누... 누가 집 앞에 버리고 갔는데 분갈이를 해주려고 가져왔어요.”
아주머니는 “잘했네 언니, 착하네”하면서 전보다 두 배는 더 넓은 화분에 식물을 옮겨 심었다.
“얘는 돈나무야. 언니 얘 잘 키워. 얘가 고마워서 돈 많이 가져다줄 거야.”
그녀가 돈나무 위에 뽁뽁이를, 뽁뽁이 위에 신문을 여러 겹 둘렀다. 어차피 차로 이동할 거라 몇 분 정도만 나와 있는 거라고 변명했다가 “언니는 슈퍼 갈 때 벗고 갈 수 있어? 이 날씨에?”라는 일침을 맞았다.
사장님은 죽이지 말고 잘 키우라고 거듭 당부했고 나는 알겠다고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궁금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화원에서 자신의 위선을 마주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집으로 돌아와 돈나무를 원래 있던 자리에 놓았다. 시든 잎 떼어내고 지지대 몇 개 세웠을 뿐인데 돈나무는 전보다 훨씬 더 품위 있는 자태가 돼 생명력을 뿜어내며 반짝거렸다. 진녹색 이파리를 오래 바라보다가 물 한 컵을 부어줬다. 처음의 애정과 마지막이 될 미안함을 담은 다짐과 약속의 한 컵이었다.
강이슬
‘SNL코리아’ ‘인생술집’ ‘놀라운 토요일’ 등 TV 프로그램에서 근면하게 일하며 소소하게 버는 방송작가다. 카카오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안 느끼한 산문집>으로 대상을 받고 <새드엔딩은 없다> <미래를 구하러 온 초보인간> 등을 펴냈다.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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