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인 은퇴 아름다운 은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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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낙엽이 물들면 그리운 기억이 있고 음악을 들으면 달려가고 싶은 장소가 있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꽃이 피고 비가 내리고 찬바람이 불고 눈이 쌓이면 그 계절에 맞게 보고 싶은 그림이 있다. 정선(鄭敾, 1676~1759)이 그린 ‘동리채국도(東籬採菊圖)’는 국화꽃이 한창인 이맘때면 떠오르는 고향친구 같은 그림이다.
한 선비가 한쪽 무릎을 세우고 소나무 옆에 앉아 있다. 술잔 옆에 국화꽃이 놓여 있는 것으로 봐 방금 전에 산책을 끝내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듯하다. 국화꽃 뒤로는 사립문이 반쯤 열려 있는데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주 찾아오지 않는 한적한 시골마을임을 알 수 있다. 선비는 국화꽃 향기를 맡으며 술을 한 잔 들이켰을까. 눈을 들어 저 멀리 있는 남산을 그윽하게 바라본다.
이 그림은 동진 후기의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시 ‘음주(飮酒)’를 소재로 삼았다. 시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도연명은 술을 워낙 좋아해 술의 성인(聖人)으로 불렸을 정도다. 그가 언제부터 술을 좋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짐작건대 때 이른 은퇴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는 40세가 돼 생계 때문에 팽택현의 현령으로 근무했는데 80여 일 만에 때려치우고 낙향해버렸다. 그러면서 ‘귀거래사’라는 시를 써서 성급하게 사직서를 던진 사연을 장황하게 늘어놨다. ‘귀거래사’로 일약 ‘셀럽’이 된 도연명의 일거수일투족은 낙향을 희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관심의 대상이었다.
낙향 후 그는 어떻게 살았을까. 그는 자신의 근황을 궁금해할 추종자들을 위해 총 20수로 된 ‘음주’라는 시에서 시시콜콜 자신의 일상을 공개했다. 그중 정선의 ‘동리채국도’는 ‘음주’의 다섯 번째 시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으로 시 내용은 이러하다. ‘마을 안에 오두막집을 엮어놓으니/ 수레와 말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물으면/ 마음이 멀어지면 사는 곳도 멀어진다네/ 동쪽 울타리 아래의 국화를 꺾어 들고/ 그윽이 남산을 바라보네/ 산기운은 해질녘에 아름답고/ 나는 새들도 무리지어 돌아가는구나/ 이 가운데 참다운 진리가 있으니/ 말로 표현하고자 하나 이미 말을 잊어버렸네.’
이 중에서 정선의 그림은 ‘동쪽 울타리 아래의 국화를 꺾어 들고(採菊東籬下)/ 그윽이 남산을 바라보네(悠然見南山)’에 해당된다. 소박하지만 만족할 줄 아는 은퇴자의 삶을 상상해볼 수 있는 구절이다.
주역의 ‘돈괘(遯卦)’에는 ‘가둔정길(嘉遯貞吉)’이란 단어가 나온다. ‘아름다운 은둔이니 바르게 함이 길하다’는 뜻이다. 이 단어를 보면서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은둔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은둔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은둔은 세상을 피하는 소극적인 행위가 아니다. 논어의 ‘술이’에서 “써주면 나의 도를 행하고 써주지 않으면 숨는다”고 했을 때의 출처진퇴(出處進退)의 한 방법이다. 출처진퇴는 벼슬길에 나아감과 물러남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선비가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따라서 도연명의 국화꽃 감상은 단순히 어여쁜 꽃을 감상하는 차원을 넘어 아름다운 은둔을 실천하는 행위라고 하겠다.
그런데 아름다운 은둔이라고 해서 일 년 열두 달이 항상 행복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도연명이라고 해서 홧김에 사표를 던진 자신의 행위를 후회한 적이 없었을까? 모르긴 해도 하루에도 열두 번은 후회했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술의 성인이 됐을까. 술의 성인을 달리 말하면 술고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술고래라고 손가락질 받는 대신 술의 성인으로 추앙받는다.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는 대신 선비의 본분을 잊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은 결과였을 것이다. 이것이 곧 아름다운 은둔, ‘바르게 함이 길하다’는 뜻이 아닐까.
조정육 미술평론가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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