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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참지 못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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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만 눈을 감고 여유를 가져보자. 그리고 우리의 삶을 잠깐만이라도 돌아보자. 대단한 것을 이루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열심히 살아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자신의 삶에 대한 자신을 바탕으로 누군가를 존중하면 배려하며 함께 살 수 있는 약간의 여유가 있는 문화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신영철 정신건강정책 혁신위원회 위원장신영철 정신건강정책 혁신위원회 위원장

신문이나 방송을 보다 보면 분노조절장애라는 단어를 가끔 보고 듣게 된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소위 ‘묻지마 범죄’, ‘화풀이 범죄’야 무슨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의 병리적 행태라고 하더라도,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하고 행동으로 옮겨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들의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듣게 된다. 심각한 정도야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의 일상에서도 흔히 경험하는 일이다. 

사실 분노조절장애라는 단어는 의학적인 용어는 아니다. 흔히 화병이라고도 생각하지만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사회적인 용어다. 화병은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쌓인 울화가 세월이 흐르며 다양한 신체적인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가슴이 답답하고, 무엇인가 명치 위로 치밀어 오르는 느낌도 드는데 마치 화산처럼 폭발하기도 하고 때로는 휴화산처럼 조용해 지기도 한다. 오랜 시간 쌓여 있던 좌절과 억울한 마음이 몸으로 표현되는 문화적 질병이다. 참아서 생기는 병이 화병이라면 분노조절장애는 반대다. 참지 못해서 생기는 사회적 질병 상태다.  

정신의학에서는 간헐성폭발장애라는 병이 있다. 자기 자신도 주체하지 못할 화가 갑자기 발생하고 폭발하고 나면 일시적으로 긴장이 풀어지지만, 곧 후회가 몰려오는 경우,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할 때 진단되는 흔치 않은 병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 말하는 분노조절장애는 이런 질병이 아니고 그냥 화를 참지 못해 폭발하는 현상을 말한다.

왜 우리 사회에 최근에 이런 현상들이 많이 발생하는 것일까? 본인이 노력해도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좌절감, 세대 갈등, 좌우 갈등, 양성 갈등 등 여러 가지 사회적인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정신의학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불안, 긴장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매사에 짜증을 내고 작은 일에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화를 내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화를 내려고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어깨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고 표정은 찡그려 있고 때로는 권투 시합을 앞둔 링 위에 오른 선수 같은 모습이다. 극도의 교감신경 흥분 상태다. 이때 작은 자극이라도 받으면 그냥 폭발해 버린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있다. 화를 내는 것과 불안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화, 분노와 불안은 같은 감정인가? 물론 아니다. 화가 나는 것은 화가 나는 것이고 불안한 것은 불안한 것이다. 전혀 다른 감정이다. 그런데 사실 같은 감정이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화날 때 가슴이 두근거릴까? 당연하다. 

그럼 불안할 때는? 물론 그때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같은 현상이다. 전혀 다른 두 가지 감정이 신체적으로 같은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불안할 때 화를 내고 화가 날 때 불안해지는 경우가 많다, 나중에는 이 두 가지 감정이 섞여버리면 지금 자신이 화가 난 것이지, 불안한 것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 7월 서울 시청역에서 진행된 트라우마 심리상담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는 시민들 모습.(ⓒ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지난 7월 서울 시청역에서 진행된 트라우마 심리상담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는 시민들 모습.(ⓒ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긴장이 높고 불안하면 작은 자극에도 크게 반응한다. 평소 기분이 좋고 편안하면 그냥 넘어갈 일도 모두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쉽게 뚜껑이 열려 버린다. 지금 밖에서 쿵 하는 소리가 크게 났다고 가정해 보자. 내가 편안하게 이완되어 있을 때는 반응에 시간이 걸린다. 몸을 긴장하고 이후 반응하게 된다. 온몸에 힘을 주고 긴장하고 있는 상태라고 생각해 보자. 소리가 들리는 순간 그대로 반응해 버린다. 자극에 대한 반응 속도가 너무 빠르다. 합리적인 생각이나 이성적 판단이 끼어들 틈이 없다. 

사회에 만연해 있는 즉각적인 분노 표출, 이로 인한 수많은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그럼 뭘 해야 하는가? 물론 세상이 바뀌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이건 일종의 문화다. 문화는 어느 날 갑자기 바뀌는 것도 아니고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혼자만의 힘으로도 안 된다. 우리 사회는 과거와 달리 예측성이 떨어진다. 변화가 너무 빠르다. 즉,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인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는 늘 긴장하고 살 수밖에 없다. 빠른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에너지를 엄청나게 소비해야 한다. 잠깐의 여유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 그래서일까. 우리 사회에서 너그러움이나 여유라는 단어가 사라진 지 오래다.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의도가 아닐지라도 말 한마디만 잘못하면 나락으로 떨어진다. 조금이라도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용납되지 않는다. 

이런 상대에 대해서는 가혹함을 넘어서 처절한 응징을 가한다. 고소 고발이 난무하고 원수가 되기도 한다. 이런 사회적 현실에서 어떻게 긴장을 줄이고 여유를 찾고 화를 다스릴 수 있을까?

세상이 바뀌어야 하지만 가장 쉬운 방법은 우선 자신이 바뀌는 것이다. 초점을 스스로에게 맞추어 보자. 심호흡을 한번 하고 어깨를 툭 떨어뜨려 보자. 혹시 지금 자신도 모르게 온몸에 힘을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겠는가? 하루 종일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저녁이 되면 뒷목도 당기고 소화도 안 된다. 몸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는 까닭이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힘들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잠시 거꾸로 생각해 보면 좋겠다. 힘들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아닐까? 편안할 때는 웃고 넘어갈 모든 일들이 내가 힘들면 전부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정말 중요한 일이라면 긴장을 최고조로 높여도 좋다. 

화가 날 만한 일이면 화를 내는 것도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사회적 공분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고 개인적인 분노는 자신을 성장시키는 위대한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부정적인 분노의 표출은 자신과 세상에 결코 도움이 되는 건강한 분노 표출은 아닌 것 같다. 

잠시만 눈을 감고 여유를 가져보자. 그리고 우리의 삶을 잠깐이라도 돌아보자. 대단한 것을 이루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열심히 살아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자신의 삶에 대한, 자신을 바탕으로 누군가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함께 살 수 있는 약간의 여유가 있는 문화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신영철

◆ 신영철 정신건강정책 혁신위원회 위원장, 경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난 10여년간 기업정신건강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며 직장인들의 정신건강 향상을 위해 노력해 왔다. 진료, 방송, 강연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2024년 대통령 직속 정신건강정책 혁신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국민들의 정신건강 증진을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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