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는 사랑을 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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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선수의 팬이 쓴 글을 읽은 적 있다. 언젠가 박찬호 관련 전시회가 열렸단다. 박찬호가 직접 도슨트로 나선다는 소식에 글쓴이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곳을 찾았는데 40분으로 예정돼 있었던 해설이 두 시간이 넘도록 이어지더란다. 아이들은 바닥에서 뒹굴며 울부짖었고 글쓴이도 힘이 들어 실신할 뻔했다는 말에 눈물이 찔끔 나도록 웃었다. 사실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박찬호 선수가 수다스럽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에게 사인을 받으려고 줄을 섰다가 앞사람과의 대화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자리를 떴다는 이야기나 식당에서 사인을 요청했다가 질문 세례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이미 유명하다. 오죽하면 말 많은 사람을 표현할 때 ‘박찬호’라는 이름을 하나의 비유처럼 사용할까.
얼마 전 우리 집에 찾아온 동생도 제 남편이 박찬호라며 학을 뗐다. 운전할 때, 밥 먹을 때, 자려고 누웠을 때는 기본이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도 문을 벌컥 열고 말을 해 귀가 아플 지경이란다. 한번은 카페 계산대 앞에서 일장 연설이 펼쳐졌단다. “나 커피 마시면 가끔 발진 올라오는 거 언니도 알지? 근데 그날은 너무 피곤해서 도저히 못 버티겠는 거야. 그래서 아메리카노를 시키려고 하니까 잔소리를 따발총처럼 하는 거야, 글쎄!” 남편이 다정해서 좋겠다는 나의 대꾸에 동생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아니 어떻게 내 뒤에 서 있던 아저씨랑 똑같은 소리를 해?” 아무래도 동생만 모르는 것 같다. 제 남편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박찬호 선수는 말이 많아지게 된 사연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었다. 팬에게는 선수를 만나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경험이겠냐고, 팬 입장에서는 궁금한 점이 많을 테니 대화를 나누는 거라고, 이야기가 자꾸만 길어지는 이유는 팬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의 말대로 사랑하는 마음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상대방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샘솟지 않을 것이다. 말을 섞기도 싫은 사람에게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할 일이 무어 있단 말인가. 그러니까 내 앞에서 조잘조잘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가 있다면 그 말이 쓸데없는 푸념이나 듣기 싫은 잔소리일지라도 나를 사랑한다는 방증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동생은 자정이 다 될 때까지 실컷 떠들고 나서야 제집으로 돌아갔다. 여기저기서 오는 연락에 온종일 시달린 데다가 퇴근하자마자 동생의 하소연에 들들 볶인지라 늦은 밤의 적막이 전에 없이 반갑다. 시간을 들여 몸을 씻고 정성을 들여 머리를 말린 후 자리에 누워 쇼트폼을 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려는 찰나, 동생이 묻지도 않은 안부를 전해왔다. “나 잘 도착했어.” 대충 대꾸하고 마무리를 지으려는데 호락호락하지 않은 동생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띠링, 띠링, 띠링띠링띠링띠링! 박찬호가 강속구를 던지는 속도로 오는 메시지를 받아치느라 손가락이 다 얼얼했다. 아이고야, 동생이 나를 참 사랑하는가 보다.
이주윤
글을 쓰고 그림도 그린다. 어쩌다 보니 맞춤법을 주제로 한 책을 여러 권 출간했다. 국어사전 속에서 온종일 헤매는 일이 싫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체질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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