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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는 다음 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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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부인과 대기실에서 진료를 기다리고 있는데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얘, 승연이 다음 달에 애 낳는단다! 걔가 외국에 사니까 그걸 이제야 알았지 뭐니?” 친척 언니가 아기 엄마가 된다는 소식에 “잘됐다!” 하는 축하보다 “힘들어서 어떡해!” 하는 걱정이 먼저 튀어나왔다. 나보다 꼭 한 살 많은 언니는 올해로 마흔하나다. 사십대에 접어들면서부터 걸핏하면 비실비실 앓고 있기에, 안과에 갔다가 이비인후과에 들렀다가 산부인과까지 방문한 날 그러한 전화를 받았기에, 정확히 말하자면 ‘산과’가 아니라 ‘부인과’지만 뭐 어쨌건 그러했기에, ‘내 한 몸 건사하기도 이렇게 벅찬데 언니는 얼마나 힘이 들까’ 하는 염려가 됐던 것이다.
나의 말을 잘못 이해한 엄마가 별걱정을 다 한다는 듯 피식 웃었다. “애 키우는 게 힘들긴 뭐가 힘들어. 네가 낳으면 엄마가 다 봐줄 테니까 일단 하나 낳아봐!” 엄마의 어이없는 제안에 콧방귀가 절로 나왔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고 남편이 있어야 아이를 낳지! 엄마는 나를 무슨 성모마리아쯤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하기야, 남편이 없는 나도 나지만 남들 다 있는 손주가 없는 엄마 역시 마음 한편이 허전하기는 할 테지. 하지만 세상일이 어디 제 뜻대로만 흘러가는가. 나는 “조카딸도 딸이니까 승연 언니가 아기 낳으면 손주 삼아 봐주면 되겠네!” 하는 말로 대화를 끝내려 했으나 엄마는 남의 손주가 아닌 ‘내 손주’가 갖고 싶다고 연신 말했다.
엄마의 ‘내 손주’ 타령은 며칠 내내 이어졌다. 철없는 아이가 장난감을 사달라고 끈질기게 조르는 것처럼 말이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아이가 된다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안 그래도 몸이 축나 힘이 들어 죽겠건만 자꾸만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며 들들 볶아대니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애써 짜증을 삼켰다. 아무것도 모르던 젊은 시절에 아무것도 없는 남자와 결혼해 나를 낳은 엄마.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많은 어린 나에게 “다음에”라는 대답밖에 할 수 없었던 엄마. 도망치고 싶을 만큼 힘겨운 나날을 보내면서도 내 앞에서는 늘 웃음 지었던 엄마. 엄마가 나에게 베풀었던 사랑을 이제는 그대로 갚을 차례니까.
오늘도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누구는 결혼을 했네, 누구는 아이를 낳았네, 누구는 글쎄 셋째를 가졌네, 하는 이야기 끝에 더 늦기 전에 하나 낳아야 하지 않겠냐는 은근한 압박이 들어왔다. 엄마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나는 대답했다. “다음에.” 됐다는 말도 아니고, 싫다는 말도 아닌, 다음이라는 대답이 생경했는지 “뭐라고?” 하며 엄마가 반문했다. “지금은 어렵고 다음에. 다음 생에는 내가 손주 하나 꼭 낳아줄 테니까 좀 기다리셔!” “얘, 그걸 지금 농담이라고 하니?” 노발대발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휴대전화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이참, 엄마한테 배운 대로 했는데 이게 아닌가?


이주윤
글을 쓰고 그림도 그린다. 어쩌다 보니 맞춤법을 주제로 한 책을 여러 권 출간했다. 국어사전 속에서 온종일 헤매는 일이 싫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체질인 듯싶다.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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