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8이 엄마가 되고 언니가 되고 전화 오면 ‘밥 먹었냐’부터 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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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위기임산부 상담기관(애란원) 이지은 상담사
“철분이나 엽산 잘 먹고 있지?” “아기는 씩씩하게 발차기 잘하지?” 임신부들에게 너무 당연한 이 질문을 열 달 내내 한 번도 받지 못한 이들이 있다. 뜻하지 않은 임신으로 출산과 양육에 어려움을 겪는 ‘위기임산부’다. 출산 때까지 임신 과정을 홀로 감내해야 하는 이들에겐 축복이어야 할 임신이 가슴 아픈 사연이 된다. 그래서 서울 위기임산부 상담기관인 애란원의 이지은 상담사는 전화가 걸려오면 꼭 묻는다. “밥은 잘 먹고 있는지”를.
“청소년이 임신을 했다거나 혼외자를 가졌다거나 하는 사회적 사정을 다 빼고 나면 이들에겐 단 한 문장만이 남죠. ‘아이를 가진 여성’입니다. 우리는 결코 도덕적으로 위기임산부의 사정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태아의 생명에 집중해요. 자신의 상황을 무겁고 무섭게, 마치 큰 죄를 지은 것처럼 여기다 여느 임신부처럼 일상적인 질문을 받으면 ‘아, 나도 한 생명을 품고 있는 엄마구나’ 하며 마음을 열게 됩니다.”
이 상담사는 이들에게 “고맙다”는 말도 빼먹지 않는다. 상담사를 찾는 이들의 배는 어김없이 남산만큼 불러 있다. 긴 망설임의 흔적이다.
“대부분 부모님은 물론 친구 등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서 끙끙 앓다 마지막이 돼서야 절박한 심정으로 전화를 걸어요. 39주 차, 40주 차인 경우도 있습니다. 여태 그 아이를 품어줘서 고맙다고 말해요. 그게 언제든 용기 내 전화번호를 눌러줘서, 꺼내기 힘든 얘길 들려줘서 감사하다고. 그동안 혼자 아이를 지키느라 고생이 많았다, 이제 우리가 도와줄 테니까 같이 헤쳐나가보자고 합니다.”
국번 없이 ‘1308’을 누르면 들을 수 있는 말이다.
단순 상담사 넘어 보호자 역할까지
1308은 이전에는 없던 번호다. 보건복지부가 7월 19일 위기임산부 전용 상담번호로 새로 개통했다. 물론 그전에도 위기임산부 상담전화는 있었다. 모두 지방자치단체나 민간 차원이었다. 중앙정부 주도의 운영은 이번이 처음이다. 복지부는 이를 위해 전국 17개 시·도의 16개 상담기관을 전담센터로 지정했다. 민간의 전문성을 그대로 활용하겠다는 차원이다.
서울센터로는 1960년 개소한 애란원을 선정했다. 60년 넘게 미혼모 등의 출산 및 양육 지원과 자립에 힘써온 곳이다. 이 상담사는 “1308 개통으로 그동안 다양한 기관에서 분절적으로 제공받던 임신·출산·양육 상담과 지원을 보다 체계적으로 받을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전화를 걸면 임산부 위치와 가장 가까운 지역상담기관으로 자동 연결된다. 만일 거주 지역 상담센터가 싫다면 ‘0’번을 누르면 된다. 상담자 가족이나 생부와의 관계 상담, 심리 상담, 산부인과 관련 상담이 가능하다. 우울증 등 정신질환이 있다면 의료 지원도 연계받을 수 있다. 상황에 따라 생계·주거·고용·교육·양육·법률 서비스도 받을 수 있다.
전화 상담뿐만이 아니다. 대면 상담과 긴급출동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갑작스러운 진통으로 병원에 가야 하면 연계된 병원으로 이송과 함께 상담사가 내원해 손을 잡아준다. 이 상담사는 “심야시간에 병원으로 달려가는 일도 종종 있다”면서 “최근에도 아이 아빠와 연락이 두절된 임신 39주 차 30대 미혼 여성이 센터의 도움으로 안전하게 출산했다”고 말했다. 단순한 상담사에 그치는 게 아니라 보호자 역할까지 하는 셈이다.
“위기임산부 상담은 전화 한 통으로 끝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한 번 전화가 연결된 이후에는 무조건 대면한다는 목표로 상담에 임합니다. 위기임산부들은 자기만의 세계에 갇히기 쉬워요. 직장을 그만두고 친구도 안 만나고 사회적·심리적으로 고립되다 벼랑 끝에서야 도움을 요청해요. 반드시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의 사정을 더 잘 파악할 수 있는데다 유대관계도 형성할 수 있어 지속적으로 도울 수 있어요.”
첫 대면 상담이 성사되면 보통 1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만난다. 이를 통해 출산 이후의 계획까지 함께 구상한다. 이 상담사는 “첫 전화가 마지막 전화가 되지 않도록 처음 접촉한 상담사가 끝까지 책임지는 구조”라고 했다.
번호 개설 한 달여. 서울에서만 약 50명의 위기임산부가 상담과 시설입소, 긴급지원, 병원 동행 등의 도움을 받았다. 한때 중절수술과 영아유기까지 고민했던 위기임산부들은 상담 과정에서 아이를 직접 키우겠다고 결심하기도 한다. 이때 상담사들은 ‘아이는 모름지기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당위적이고 계몽적인 얘기는 하지 않는다.
이 상담사는 “24시간 직접 아이를 키워야 하는 엄마에게 육아는 현실”이라면서 “‘현실 육아’의 고충도 함께 알려주면서 육아를 받아들이고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했다. 그는 “출산 후 각종 수당을 비롯해 미혼인 경우 한부모 지원제도 등 상황에 맞는 지원책을 알려준다”면서 “지속가능한 육아를 위해 산모의 자립과 진로고민도 함께 해주고, 일을 하면서도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아이돌봄 제도 등을 설명하면 산모들은 점차 ‘내가 이 아이를 직접 키울 수도 있겠구나’ 하며 용기를 낸다”고 했다.
1308 전화 한 통으로 아이의 운명이 달라지는 순간이다.
1308은 생명을 구하는 전화
때문에 이 상담사는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이 있다. 그에게 아기 울음소리는 기쁨이자 안도감이다.
“위기임산부와 오랜 시간 대화하고 고민을 나누다 보면 가족이 되는 기분이에요. 때론 이모가 되고 언니가 되며 엄마의 심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기는 상담사에게도 각별해요. 10대 위기임산부의 아기 이름을 손수 지어준 일도 있어요. 그 이름으로 무사히 출생신고도 마쳤고 건강히 잘 자라는 중입니다.”
물론 힘들 때도 있다. 성적인 농담을 던지는 장난전화가 반복적으로 걸려오기도 한다. 이 상담사는 “고충도 있지만 보람이 더 크다”면서 “오늘도 한 위기임산부가 출산을 했는데 상담사들은 한 생명이 세상의 빛을 봤다는 사실을 동력으로 삼으며 일한다”고 했다.
서울센터의 상담사는 총 8명이다. 모두 사회복지사다. 위기임산부 관련 내·외부 교육도 철저히 이수했다. 근무는 8시간씩 3교대다. 24시간 쉬지 않는다.
전화는 하루 평균 10통 정도 온다. 1308 번호가 차츰 알려지며 전화량도 늘고 있다. 저녁 이후부터 심야시간에 더 자주 울린다. 수화기 너머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떼고 끝내 복받쳐 우는 경우도 많다. 이 상담사는 “이 현실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출산 이후도 걱정되니 결국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라며 “더 이상 혼자 감당하지 않도록, 외로운 출산은 없도록, 우리가 같이 있을 테니 부디 용기를 내주면 좋겠다”고 했다.
이 상담사는 8년 경력의 사회복지사다. 애란원 입사 전에는 장애인 자립생활센터에서 일했다. 장애여성의 임신·출산 과정을 지켜보며 임신·출산과 관련된 좀 더 폭넓은 도움을 주고 싶어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그는 “위기임산부를 상담하려면 각종 지원제도는 물론이고 신체 변화, 심리상태 등을 숙지해야 하므로 매일매일이 배움의 연속”이라면서 “한 명의 생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배움에 나태해지지 않는 복지사가 되겠다”고 말했다.
박지현 기자
*위기임산부란?
‘모자보건법’ 제2조 제1호에 따른 임신 중 여성 및 분만 후 6개월 미만인 여성으로서 경제적·심리적· 신체적 사유 등으로 인해 출산 및 양육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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