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추억입니다만 > 정책소식 | 정보모아
 
정책소식

부끄러운 추억입니다만

작성자 정보

  • 공감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btn_textview.gif



비행을 하다 보면 생각을 많이 한다. 이륙 후 순항 고도에 이르면 수시간 동안 같은 고도를 유지하며 비행하게 된다. 계속 같은 자세로 불이 꺼진 조종석 안에서 말없이 앞을 응시하고 있다 보면 항공 계기판 너머로 지난 삶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곤 한다.
대학에 처음 입학했을 때가 떠오른다. 나는 “대학만 가면 살도 빠지고 여자 친구도 금방 생긴다”는 선생님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던, 더벅머리에 안경을 낀 평범한 남학생이었다.
패션 감각도 없어서 항상 비슷한 체크무늬 셔츠와 면바지를 번갈아 입고 등산용 백팩의 좌우 주머니에 우산과 물통을 장착한 채 서울 신촌 거리를 활보했다.
결과적으로 선생님은 거짓말쟁이였다. 대학에 간다고 해서 모두 여자 친구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남들 다 하는 소개팅과 미팅도 해봤지만 성과는 신통치 않았다. 좋아하는 이성에게 고백했다가 차이고 나서 마치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친구 앞에서 술을 마시며 펑펑 울었던 기억도 난다.
비슷한 이유로 괴로워하던 친구와 술을 마셨는데 그 친구가 사라지는 바람에 실종신고를 한 적도 있다. 다행히 다음날 그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캠퍼스 안에서 설립자 동상을 끌어안고 잠들었다 일어나 보니 경비원이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더라고 했다.
결혼을 하고 자녀까지 둔 지금 지난날의 ‘흑역사’를 꺼내놓을 수 있는 이유는 그때는 그렇게 창피하고 심각했던 일들이 이제는 혼자 슬며시 웃음 짓게 하는 에피소드가 됐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으면서 인생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도 달라졌다. 많은 사람과의 관계와 경험 속에서 가치관도 변해갔다. 그때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슬펐던 일들이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이제는 무병, 건강, 자녀 교육 같은 것들이 무엇보다 소중해졌다. 삶의 터전도 서울에서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로 바뀌었다. 앞으로 10년 뒤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그때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바라건대 부끄러운 기억보다는 자랑스럽고 뿌듯한 기억이 더 많았으면 한다.
참,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나는 여전히 옷을 못 입는다. ‘옷이란 외부의 불쾌한 자극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보온 효과를 주는 천쪼가리’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파일럿이 되고 나니 다행히 옷 걱정 없이 유니폼만 입으면 돼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이렇게 어떻게든 살아간다.


원요환
프로N잡러 중동 파일럿. 국내 경제지 기자 출신으로 지금은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민항기 조종사로 일하고 있다. 이외에도 작가, 리포터, 콘텐츠PD 등으로 활동 중이다.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최근글


  • 글이 없습니다.

새댓글


  • 댓글이 없습니다.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