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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와 김소월 공자와 김수영 한여름의 탐정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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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을 보면 나도 모르게 탐정이 될 때가 있다. 작가가 한 작품을 제작할 때 어떤 충동이 일어 붓을 들게 됐는지 그 배경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육성으로 당시 상황을 직접 들려주면 좋겠지만 이미 수백 년 전에 세상을 떠났으니 부연설명을 해줄 리 만무하다. 그저 작품만 남겨놓고 찾아볼 테면 찾아보라는 것이다.
그때부터 연구자는 자신이 갈고닦은 지식을 총동원해 작품을 분석하고 추적한다. 특히 그림 속에 글(제발)이나 이름 혹은 낙관이 들어 있지 않을 경우에는 그야말로 연구자의 내공이 시험대에 오른다. 그럴 때는 그 작품이 어느 작가의 화풍과 비슷한지부터 찾아본다. 작가의 화풍은 사람의 지문 같은 것이라서 이름이나 낙관이 없어도 작가를 찾아내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옛 그림에서는 대가의 그림을 베끼는 방작(倣作)이 많았기 때문에 그 사연을 적어놓지 않을 경우에는 진품인지 방작인지 헷갈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무리 비슷해도 진짜와 구분되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맥락에서 그림이 만들어졌는지를 찾아내게 되면 작가의 육성을 듣는 듯 희열을 느낀다.
‘공산무인도(空山無人圖)’는 조선 후기의 기인(奇人)화가 최북(崔北, 1712~1760)의 작품이다. 나무 아래 빈 정자와 계곡물이 전부인 단순한 그림이다. 그림을 그리다 만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무덤덤한 붓질이다. 그림에는 사람의 발자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정적이 드리워져 있다. 젊었을 땐 이 작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적막함의 무게를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나이가 좀 들어야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작품이다.
우측 정자 옆 나무는 건조하고 깔깔한 반면 좌측 계곡 옆의 풍경은 물기에 젖어 축축한 느낌이다. 대조된 붓질의 풍경 상단에는 ‘공산무인 수류화개(空山無人水流花開)’라고 적혀 있다. ‘빈산에 사람은 없는데 물은 흐르고 꽃이 핀다’라는 뜻이다. 이 문장은 송나라의 시인 소식(蘇軾)이 ‘십팔대아라한송(十八大阿羅漢頌)’에 적은 문장의 끝 구절이다. 최북은 소식의 시를 그림으로 환원시켰다.
소식의 시와 최북의 그림은 빈산에 사람이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일까, 아니면 사람이 있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도도하게 흐르는 계절의 변화를 표현한 것일까. 헷갈릴 때는 김소월의 시 ‘산유화’를 읽어보면 된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이렇게 시작된 ‘산유화’는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로 이어진다. 김소월은 ‘빈산에 사람은 없는데’를 ‘산에 사람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꽃은 핀다’로 해석했다. 인간이 찾아와 꽃의 아름다움을 발견해주든 말든 상관없이 피었다 지는 꽃의 세계를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라고 적은 것이다.
최북의 그림과 김소월의 시가 소식의 시에서 영감을 얻었다면 김수영의 시 ‘풀’은 공자의 언행에서 영감을 얻었다. 논어의 ‘안연’에는 공자가 당시 대부였던 계강자에게 한 말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그대가 선하고자 하면 백성들이 선해질 것이니,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에 바람이 가해지면 풀은 반드시 쓰러진다.’ 이렇게 상당히 교훈적인 산문을 김수영은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와 같이 멋진 시로 승화시켰다. 그야말로 청출어람이다. 쪽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게 되면 표절이라는 폄하 대신 청출어람이라고 칭찬한다. 고전에는 푸른 물감을 뽑아낼 쪽들이 의외로 많다.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더니 그림에 숨어 있는 ‘쪽’을 찾느라 여름 가는지 모른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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