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릉 두 무덤에 숨은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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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
오랜만에 새벽 공기를 마시며 경기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서오릉을 방문했다. 3~4년 만인 듯했다. 서오릉 주변에 위치한 국밥집 중 한 군데에 들러 선지해장국으로 아침을 먹었다. 눈이 온 다음날이라 그런지 주변은 하얀 배경 속에 서늘함이 느껴졌다.
서쪽에 위치한 다섯 기의 왕릉이라 서오릉(西五陵)으로 불리는 이곳은 조선왕조의 다섯 능 ▲경릉(敬陵) ▲창릉(昌陵) ▲익릉(翼陵) ▲명릉(明陵) ▲홍릉(弘陵)이 있다. 이중 가장 유명한 능의 주인공은 아무래도 숙종이 아닐까 싶다. 숙종의 총애를 두고 싸운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사건은 사극으로도 여러 번 만들어졌을 정도이다.
오늘따라 곧장 들어가지 않고 표를 끊은 채 입구 왼쪽에 크게 설치해둔 서오릉 지도를 가만히 살펴본다. 입구를 따라 들어가면 맨 먼저 숙종의 능인 명릉을 만날 수 있고 그 뒤로 익릉, 경릉, 홍릉, 창릉이 있다. 서오릉을 자세히 그려둔 지도가 크게 배치돼 있어 과거에 방문했던 기억을 점차 되찾았다.
이게 뭐지? 지도를 살펴보다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했다. 지도에 그려진 다섯 능 중 중간에 있는 경릉을 자세히 뜯어보니 정자각 위로 능 두 기가 있다. 그런데 지도에 그려진 그림임에도 각각의 거리가 멀게 떨어져 있는 데다 왼편 능은 봉분을 중심으로 꽤 복잡하게 석물이 배치됐지만 오른편 능은 석물이 단지 몇 개밖에 보이지 않는다. 참으로 이상하다. 하나의 왕릉 영역임에도 어째서 이처럼 무덤양식의 격에 차이가 큰 것일까? 의문을 풀기 위해 오늘은 경릉을 중심으로 구경해보기로 하자.
목표가 구체적으로 정해지자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눈길이라 약간 미끄럽지만 목표가 생기니 흥분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 만큼 오늘은 숙종의 명릉을 가볍게 지나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재실(齋室) 건물을 만났다. 재실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숙식 및 제사 음식을 장만하는 장소로 주로 무덤이나 사당 옆에 지었다. 지금이야 제사문화가 많이 옅어졌지만 조선시대에는 행사와 제사가 수시로 이뤄졌기에 이런 장소가 꼭 필요했다. 과거에는 능마다 재실이 한 채씩 위치했으나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지금은 서오릉 전체에서 하나의 재실만 겨우 남아 있다. 본래 숙종의 명릉에 딸린 재실이라 한다.
재실을 지나 길을 따라 위치한 수경원(綏慶園), 순창원(順昌園)도 지나쳤다. 서오릉에 있는 또 다른 왕실 무덤으로 능(陵)이 아닌 원(園)이라는 명칭을 쓴다. 이쯤 해서 조선왕릉을 재미있게 구경하기 위해 하나 알아둘 내용이 있다.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이라 부른다. 왕과 왕비 다음부터는 하나씩 격이 떨어진다. 이때 쓰는 용어가 원이다. 세자와 세자빈, 차기 왕이 될 핏줄을 낳은 어머니지만 신분이 후궁인 인물의 무덤에 붙였다. 원은 왕과 왕비를 제외하면 최고 수준의 왕실가족 무덤이었다. 예를 들어 영조에 의해 뒤주에서 참혹한 죽음을 맞이한 사도세자의 무덤을 처음에는 현륭원(顯隆園)이라 불렀다. 후대에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면서 비로소 능으로 승격돼 현재는 융릉(隆陵)이라 부른다.
신분에 따라 달리 부른 무덤
다음 단계인 묘(墓)는 왕과 왕비, 그리고 직계 왕실 최고 신분을 제외한 이들의 무덤이다. 태종 이방원의 첫째 아들이자 동생 충녕대군에게 왕 자리를 넘긴 양녕대군이 해당된다. 서울 동작구에는 ‘양녕대군 이제 묘’가 있다. 본디 세자였으나 강제 퇴위된 후 대군(大君) 신분이 됐기에 그의 무덤 역시 원이 아닌 묘로 불렀다. 왕의 자식인 공주(公主), 군(君), 옹주(翁主) 등도 묘라고 부른다. 물론 일반인의 무덤도 묘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능→원→묘’ 순서로 무덤마저 신분의 격에 맞춰 달리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수경원, 순창원도 왕과 왕비가 아닌 왕실 신분의 무덤이다. 우선 수경원은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무덤이며 본래 서울 연세대학교 안에 있었으나 현대에 들어와 이곳으로 옮겼다. 순창원은 조선 13대 왕인 명종의 세자였던 순회세자와 그의 부인인 세자빈 공회빈 윤씨의 무덤이다. 걷다 보니 드디어 목표지점인 경릉에 도착했다. 저 멀리 정자각이 반긴다. 오늘따라 눈길에 서 있어 남다른 매력이 느껴졌다.
정자각 앞으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걸어가 무덤이 있는 언덕 위를 올려다보자. 왼쪽에는 봉분을 중심으로 꽤 복잡하게 석물이 배치된 능이 있고 오른쪽에는 석물이 얼마 보이지 않는 능이 있어 더욱 대비된다. 직접 눈으로 살펴보니 왼편은 왕릉의 격식에 따라 만들어졌고 오른편은 원의 격식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분명해 보인다.
외관만 보고 어떻게 능과 원을 파악할 수 있을까? 능과 원은 명칭뿐만 아니라 봉분을 중심으로 한 석물, 즉 돌로 만든 여러 장식물 역시 차이를 뒀다. 능은 봉분 주위로 난간석을 두르고 석물로 다양한 동물과 문인석, 무인석을 위치시킨 반면 원은 이보다 단순화해 봉분에 난간석이 존재하지 않으며 석물도 훨씬 적은 숫자가 배치됐다. 누구든 알고 보는 순간부터는 충분히 능과 원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
왜 경릉이라는 하나의 묘역 안에 이처럼 격을 달리하는 무덤이 함께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다행히도 이곳에 있는 설명 푯말에 상세히 적혀 있다. 이를 바탕으로 설명을 추가하자면 경릉 오른편에 있는 원 격식의 무덤 주인공은 죽을 당시 왕이 아닌 세자였다. 의경세자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의경세자는 조선 7대 왕인 세조의 장남이다. 19세라는 젊은 나이에 병으로 갑자기 죽고 말았다. 죽음을 맞이했을 당시 세자였기에 원으로 무덤이 조성됐다.
이후 의경세자의 동생이 세자가 됐고 세조를 이어 왕에 올랐다. 그가 바로 예종이다. 그런데 즉위한 지 불과 13개월 만에 20세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료들은 고민에 빠졌다. 예종의 아들은 겨우 4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에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의 아들 중 한 명을 왕으로 삼는다. 그 결과 13세 나이로 왕이 된 인물이 그 유명한 성종으로 조선 최고 전성기를 상징하는 왕이다. 성종은 왕이 되자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했다. 의경세자에서 덕종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지금 능의 주인공을 덕종이라 부르는 이유가 이 때문이며 조선 역사상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왕자가 왕으로 추존된 첫 사례였다. 첫 사례여서 그런지 왕으로 추존됐음에도 무덤 자체는 여전히 세자 때 격 그대로 유지했다. 죽어서 왕이 됐기에 능이 아닌 원의 형식을 유지한 것이다.
경릉은 사극 단골 출연 인수대비의 무덤
의경세자의 부인은 아들 성종이 왕이 되면서 높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남편이 덕종으로 추존된 만큼 인수왕대비에 올랐다. 사극에서 손자인 연산군과 악연으로 자주 등장하는 인수대비가 경릉의 주인공 중 한 명이다. 인수대비는 남편과 달리 생존한 덕분에 왕비 대접을 받은 것이다. 왕릉의 격식에 맞춰 조성된 왼편의 능이 바로 인수대비의 능이다. 이처럼 경릉은 추존된 왕인 덕종, 즉 의경세자와 부인 인수대비가 휴식을 취하는 장소다. 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살아서 어느 위치까지 올랐는지에 따라 무덤의 격마저 차이가 난 드문 경우인지라 흥미롭다. 서오릉을 방문하면 유명세가 남다른 숙종의 명릉뿐만 아니라 하나의 왕릉 영역임에도 무덤양식의 격에 차이를 둔 경릉도 자세히 살펴보면 재미있는 여행이 되지 않을까 싶다.
황윤 작가
수경원에서 출토된 유물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의 경우 본래 묘 형식으로 무덤이 만들어졌으나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자 원으로 승격됐다. 그러다 1970년 서울 연세대학교에서 지금의 서오릉으로 이장했는데 그 과정에서 발굴조사가 이뤄지며 유물이 출토됐다. 이중 명기(明器)는 제사에 사용하는 그릇을 작은 백자로 만든 것이며 묘지(墓誌)는 영조가 직접 지은 문장으로 영빈 이씨의 가계와 성품, 그리고 영조 사이에 낳은 1남 6녀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왕실 내 고위층 무덤에도 별다른 부장품이 없음을 잘 보여주는 증거물로 현재 연세대가 소장 중이다.
조선 왕릉과 도굴
고려 왕릉 대부분이 도굴된 것과 달리 조선 왕릉 40기 중 도굴당한 것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는 훨씬 단단하고 깊게 무덤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우선 시신을 지하 3m 깊이에 안치한 뒤 단단한 화강암으로 석실을 만들었다. 석실 주위에는 지금의 시멘트와 비슷한 삼물을 둘렀는데 그 두께 역시 1.2m나 돼 함부로 뚫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 말고도 도굴을 막는 방법이 하나 더 존재했다. 바로 값비싼 부장품을 무덤에 넣지 않았던 풍습이다. 무덤을 열어도 얻는 것이 없다면 굳이 처음부터 도전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황윤_ 소장 역사학자이자 박물관 마니아. 혼자 박물관과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고미술에서부터 현대미술에 대한 집필 활동을 한다.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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