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노래불러야” 건축거장의 공간에 놀러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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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묶였던 해외여행이 풀리면서 공항 출국장이 붐비고 있지만 멀리 떠나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일상 속 여행지가 우리 주변에 무궁무진하다. 골목 곳곳에 숨은 공간과 특별한 이야기를 찾아 K-공감은 ‘우리 동네 공간 이야기’를 연재한다.
김중업 건축문화의집
천장을 받친 나무는 서까래를 얹은 듯하고 창호지 바른 창문 너머에는 정원이 보인다. 한옥인가 싶지만 눈길을 돌리니 양옥인 듯도 하다. 거실 유리창 한편에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 햇살을 받아 오색빛으로 반짝이고 그을음이 남아 있는 벽난로에서는 온기가 느껴질 것만 같다.
거실 한복판에 10여 명의 사람들이 요가매트를 깔고 누웠다. 그들 머리맡에 자리잡은 싱잉볼 연주자는 크기가 다른 일곱 개의 놋그릇을 천천히 두드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종을 뒤집어놓은 것처럼 보이는 ‘싱잉볼’은 각기 다른 높낮이로 울려 집안을 가득 채웠다.
2022년 김중업 건축가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서울 성북구 장위동 ‘김중업 건축문화의집(이하 건축문화의집)’에서는 싱잉볼 명상 외에도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낮에는 저택의 안주인이 된 듯 애프터눈 티를 즐기고 밤에는 집안에 빔을 설치해 작은 영화관으로 변신했다. 아름다운 정원에서 음악회도 열리고 건물 곳곳에서 지역주민들과 벼룩시장(플리마켓)도 열었다. 어린이들과 건축과 관련된 그림책을 읽고 다양한 체험활동도 함께했다.
몇 달 전 행사에 참여한 뒤 종종 건축문화의집을 찾는다는 주부 신모(38) 씨는 “분위기가 너무나 매력적인 공간”이라고 말했다.
“문화센터나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해본 적도 있지만 건축문화의집에서 한 경험은 꽤 오랫동안 여운이 남았어요. 이 집에서 느껴지는 특별한 분위기 덕분이겠죠? 아름다운 주택에서 낯선 사람들이 다 같이 누워서 싱잉볼 연주를 들었던 시간은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어요. 또 그런 프로그램이 있다면 참여하고 싶어서 소식을 기다립니다.”
2022년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진행했던 ‘셀로판아트 워크숍’도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건축문화의집 곳곳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에서 착안해 아이들이 셀로판지로 동네 지도를 만들도록 했다. 활동이 끝나고 이 작품을 거실 유리창에 붙였더니 관람객들이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인 줄 알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장소의 특징을 살린 기획 덕분에 아이들의 창작품이 그 자체로 전시물이 된 셈이다.
정작 처음 방문한 관람객들은 건축문화의집에 들어오기를 망설인다고 한다. 성인 남성 키를 훌쩍 넘는 하얀색 담장에 ‘김중업 건축문화의집’이라고 적혀 있지만 드라마에 나올 법한 단독주택을 보면 과연 여기가 전시관이 맞나 의아하기 때문이다.
마당 옆에 난 돌계단을 올라 나무로 된 현관문을 열면 소설 <작은 아씨들>의 둘째 딸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둘째 조가 이웃에 사는 부잣집에 초대받아 방문한 것처럼 처음엔 조심스럽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면 바닥과 천장이 짙은 갈색 나무로 마감돼 있다. 색감이 인위적이지 않고 고풍스럽다. 자칫 어두울 수 있는 집안은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덕분에 생기가 돈다. 신발을 벗는 현관과 1층에서 2층으로 이어진 계단, 거실 유리에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 있다. 오래된 주택에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으로 투과된 햇빛이 알록달록한 색을 입힌다.
거실로 들어서면 커다란 유리창 밖으로 정원이 내다보이고 한쪽에는 아직 그을음이 남아 있는 벽난로가 있다. 나무색 타일이 깔린 거실 중앙에는 샹들리에가 우아한 빛을 내고 있다. 식당에는 방금 집주인이 차를 마시고 있었을 것만 같은 6인용 식탁이 보인다.
집주인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져서일까? 건물 곳곳에서 보이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오히려 ‘앤티크’하게 느껴진다. 양말을 신고 집안 곳곳을 구경하다 보면 전시관에 온 게 아니라 특별히 누군가에게 초대된 듯한 착각에 빠지고 만다. 금방이라도 머리 희끗희끗한 안주인이 차를 내올 것 같다.
2층으로 이어진 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폭이 좁고 긴 샹들리에와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 어우러져 있는 이곳은 건축문화의집에서 가장 인기 있는 포토존이다. 독특한 조명과 알록달록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배경으로 나무 계단을 오르는 장면을 연출하면 ‘인증샷’ 완성이다.
2층은 한옥인 듯 양옥인 듯 오묘한 매력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거실 한쪽을 가득 채운 창호지 바른 창문을 보면 영락없는 한옥 같지만, 한쪽에는 1층처럼 서양식 벽난로가 있다. 서까래를 연상케 하는 천장을 구경하다 발길을 옮기면 방 안쪽에 민트색으로 꾸며진 프랑스 풍의 화장실이 눈길을 끈다. 짙은 색 벽타일과 비정형 욕조가 인상적인 화장실 옆에는 민트색으로 칠한 드레스룸이 80년대에 설치한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거실 안쪽에 있는 전시관에서는 김중업 건축가의 생애와 대표작품 소개 등을 볼 수 있다. 세계적인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제자’이자 우리나라에 모더니즘 건축기법을 전수한 김중업은 전쟁 직후 폐허가 된 나라에서 건설을 넘어 건축을 이야기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세계 건축의 흐름과 소통하며 우리나라 건축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려는 노력 덕분에 ‘현대 건축가 1세대’로 꼽힌다. 그중 건축문화의집은 서양 주택의 형태에 한국적 요소를 가미한 김중업 건축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곳이다.
건축문화의집을 담당하는 성북문화재단 김다미 씨는 “주민들이 계속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집은 노래불러야 한다”는 김중업 건축가의 말처럼 실제로 주민들이 함께 노래하고 어울리고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꾸려나가고 있다.
김씨는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건축문화의집에서 주민들이 원하는 경험이 무엇인지 깨달았다”면서 “건물이 주는 힘과 고즈넉한 분위기를 온전히 느끼면서 힐링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계속 주민들에게 ‘이곳에 놀러오세요’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어요. 단순한 전시관에 그치지 않으려면 주민들이 계속 찾아주셔야 해요. 그래야 의미 있는 공간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곳은 대중교통으로 편하게 올 수 있는 곳도 아니고 주차공간도 없어서 자칫하면 정말 큰마음 먹고 와야만 하는 곳이 돼버릴 수 있거든요. 애써서 찾아오고 싶은 공간이 될 수 있게 하려면 오신 분들과 더 친밀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봐요.”
앞으로도 건축문화의집은 다른 전시관과 달리 관람객들이 신발을 벗고 들어올 수 있다는 이점을 잘 살려 프로그램을 준비할 계획이라고 한다. 누군가의 집에 놀러오는 기분이 드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이다. 반대로 “가정집 같아서 허락 없이 들어오면 안될 것 같다”는 관람객들의 의견을 반영해 ‘가든마켓’을 기획하기도 했다. 정원부터 건물 초입까지 테이블을 놓아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와도 되는 공간이라는 것을 알렸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대관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1주일 전에 예약하면 1·2층 거실과 어린이 책방, 부엌, 세미나실 등을 빌릴 수 있다. 열 명 내외로 인원을 제한하며 공공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건축문화의집은 유명 건축가의 문화유산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단순히 그의 업적을 소개하는 전시관에 그치지 않는다. 자주 놀러오고 싶은 이웃집으로, 지역문화의 거점으로 거듭나려는 노력이 더 많은 주민과의 인연으로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심선혜 객원기자
건축가 김중업(1922~1988년)
1939년 3월 평양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요코하마 고등공업학교 건축학과에 진학했다. 이곳에서 파리미술대학 출신인 나카무라 교수로부터 건축교육을 받고 고전에 대한 눈을 떴다.
파리에 있는 르 코르뷔지에 건축사무소에서 3년 6개월간 건축 및 도시계획을 공부했다. 1956년 3월 귀국해 김중업건축연구소를 열고 홍익대학교에서 건축학을 가르쳤다.
김중업 대표 건축
1 부산시열린행사장 (구 부산시장 관사)
화제의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속 순양그룹의 본가 ‘정심재’는 김중업의 작품이다. 부산 수영구 남천동에 위치한 곳으로 1980년대 대통령 별장으로 지어졌다. 전두환 전 대통령 지시로 1985년 완성됐으며 당시 41억 5700만 원이 투입됐다. 2020년까지 부산시장 관사로 쓰였으나 ‘부산시열린행사장’으로 이름을 바꿔 일반인에게 개방 중이다. 박형준 시장이 관사에 입주하지 않는 대신 전시·공연 등을 위한 공간으로 바꿔 2024년 1월 개방할 계획이다.
2 서산부인과(현 아리움 사옥)
1965년 김중업이 설계한 서울 중구 장충동의 지하 1층, 지상 5층 규모의 건물. 병원과 주거용으로 건축된 서산부인과 건물(현 아리움 사옥)은 모서리가 없는 둥근 곡선들로 이어져 있다. 가우디와 르 코르뷔지에게 영향받은 듯한 외관은 완공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봐도 상당히 이색적이다. 당시 건축기술로 구현하기 어려웠을 이 건물은 지금까지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3 서울올림픽 평화의 문
서울올림픽공원의 대표 상징물이자 정문 역할을 하고 있는 평화의 문은 김중업이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새로운 시대로의 진입’이라는 뜻을 담아 한옥 처마를 상징하는 곡선과 날렵한 각을 대비되게 표현했다. 마치 새가 날개를 편 듯한 모습이다. 평화의 문 앞에는 올림픽 상징(엠블럼)이 있고 날개 부분의 천장에는 서양화가 백금남의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건축과 미술이 교차하는 새로운 시도가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는다.
4 김중업 건축박물관
경기 안양시 유유제약 공장 건물이 김중업건축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공장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근대 건축의 원칙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1950년대에 설계한 공장 건물 4개 동을 김중업건축박물관, 안양박물관, 교육관, 사무동으로 활용하고 있다. 대부분 산업 건축물에 미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았던 시절에도 김중업은 출입문, 손잡이와 같은 세밀한 부분까지 디자인해 건물 자체도 눈여겨 볼 만하다.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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