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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의 나라’서 만나는 바로크 미술 3대 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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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은 운하의 나라, 네덜란드의 수도다. 낮은 땅이라는 뜻의 네덜란드라는 국호도 전 국토(4만 1850㎢)의 25%가 해수면보다 아래에 있는 지형적 특성에서 유래했다. 호수와 강을 뺀 실제 국토 면적의 5분의 1도 간척사업으로 일군 땅이다. 육지를 뚫어 홍수를 예방하고 배로 사람이나 물건을 실어나르도록 만든 인공수로인 운하가 발달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90개가 넘는 인공 섬을 1000여 개의 다리로 연결한 도시 암스테르담도 도시계획사업에 따른 운하의 도시다. 헤런 운하, 프린선 운하, 케이저르 운하 등 17세기에 굴착된 대형 운하 3개를 중심으로 총연장 100km에 이르는 동심원 모양으로 감싼 형태의 암스테르담 구(舊)시가지는 환(環) 운하 지역으로 불리는데 201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바다 매립 공사를 통해 만든 간척지 위에 세운 신(新)시가지와 달리 구시가지에 약 400년 전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름난 관광지도 구시가지에 밀집해 있다.
암스테르담이라는 도시 이름은 1270년대 홍수를 예방하기 위해 암스텔강 양쪽 기슭에 제방을 쌓아 만든 암스텔 댐에서 비롯됐다. 중세시대에 축조된 댐에 기원을 둔 유구한 도시답게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많다. 1213년경에 건축된 암스테르담 구교회와 1408년에 완공된 암스테르담 신교회,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영화(榮華)가 투영된 암스테르담 시청사였다가 1808년 네덜란드를 점령한 나폴레옹 황제(1771~1821, 재위 1804~1814, 1815)의 동생인 루이 보나파르트(1778~1846, 네덜란드 국왕 재위 1806~1810)가 거처로 사용하면서 왕궁으로 성격이 바뀐 암스테르담 왕궁,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설립한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인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 등이 대표적이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의 기원
암스테르담을 상징하는 명소로 빼놓지 말아야 할 장소가 또 하나 있다.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의 황금기를 구가한 3대 거장들의 영혼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바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이다. ‘빛의 화가’ 렘브란트(1606~1669년)와 네덜란드 초상화의 창시자 프란스 할스(1580~1666년), 평범한 일상적 풍경을 예술적 경지로 승화시킨 네덜란드 풍속화의 대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1632~1675년)의 작품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세계적인 미술관이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과 가까운 거리에 네덜란드가 낳은 불세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작품세계 전모를 감상할 수 있는 반 고흐 미술관도 있다.
1년 365일 연중무휴로 운영되는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의 기원은 17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지 6년 후인 이 해에 프랑스군은 네덜란드 연합공화국을 침공했다. 당시 네덜란드 연합공화국은 총독이 왕을 대리해 통치하는 체제였는데 그 자리를 마지막으로 지킨 인물은 오랑주 가문 출신의 윌리엄 5세(1748~1806)였다.
프랑스군은 윌리엄 5세를 강제로 쫓아낸 뒤 네덜란드연합공화국을 해체하고 프랑스 속국 형태의 바타비아공화국을 세웠다. 권좌에서 쫓겨난 네덜란드 연합공화국 최후의 총독 윌리엄 5세는 선대 총독들이 수집해온 오랑주 가문의 미술품 컬렉션을 몰수당한 뒤 런던으로 망명했다. 프랑스군이 강탈한 오랑주 가문 컬렉션 중 일부가 훗날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의 효시(嚆矢)인 국립미술갤러리의 물적 토대가 된다. 나머지 일부는 루브르박물관으로 강제 이관됐다.
오랑주 가문(House of Orange)은 프랑스 남부 옛 프로방스 지역의 중세 오랑주공국을 지배한 왕실 가문으로 네덜란드연합공화국 시절 총독 배출의 산실이었다. 1795년 1월 출범한 네덜란드 연합공화국의 계승국가인 바타비아공화국은 1806년 6월 나폴레옹 황제가 네덜란드왕국을 세우고 초대 국왕에 자신의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를 임명하면서 막을 내렸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의 역사
바타비아공화국 시절인 1798년 11월, 정부 차원에서 미술관을 설립하기로 한 데 이어 1800년 5월 31일 헤이그에 있는 하우스텐보스에서 오랑주 가문 컬렉션인 약 200점의 미술품을 기반으로 국립미술갤러리가 문을 열었다. 1805년 헤이그 비넨호프에 자리한 윌리엄 5세 갤러리로 이전했다가 1808년 루이 보나파르트의 거처인 암스테르담왕궁으로 옮겨 왕실 미술관으로 새롭게 개관했다.
이때 렘브란트의 ‘야간 순찰’(1642) 등 암스테르담시에서 보유하고 있던 미술품들도 왕실 미술관에 대여돼 전시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회화를 중심으로 왕실 미술관의 컬렉션 확장에 공을 들이던 루이 보나파르트는 1812년 10월 나폴레옹 군대가 러시아에서 퇴각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자 이듬해 네덜란드에서 철수했다.
프랑스군에 의해 강제 폐위된 윌리엄 5세의 아들 윌리엄 1세(1772~1843, 재위 1813~1840)가 왕실의 새 주인이 됐다. 윌리엄 1세는 1815년 미술관 명칭을 현재의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으로 바꾸고 루브르박물관에 있던 오랑주 가문의 컬렉션도 돌려받았다.
왕궁 안에 있던 국립미술관은 1817년 암스테르담 운하 지구에 건축된 17세기 신고전주의 저택인 트리 펜하우스로 이전됐다. 트리 펜하우스는 날로 증가하는 컬렉션을 수용하기에는 공간이 너무 좁고 건물 구조가 미술관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여론에 따라 미술관 전용 건물을 신축하기에 이르렀다. 1885년 암스테르담 중심부 박물관 광장에 신축된 건물이 지금의 국립미술관이다.
신축 미술관 설립을 위한 설계공모전은 1863년 처음 열렸으나 당선작을 선정하지 못해 10년 넘게 지지부진하다 1876년 두 번째 공모전에서야 당선작이 결정됐다. 주인공은 네덜란드 건축가 겸 복원전문가 피에르 카이퍼스(1827~1921)로 암스테르담 중앙역과 100여 개의 교회를 설계한 것으로 유명하다.
네덜란드 고딕 양식에 중점을 둔 가운데 르네상스 양식을 일부 절충한 네오고딕 양식의 설계안에 따라 1876년 10월 1일 착공에 들어가 8년 9개월만인 1885년 7월 13일 완공됐다.
건물 내부도 회화, 조각, 스테인드글라스 등 전시공간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분야별 전문가들이 맡아 설계했다.
고풍스러운 붉은색 외관을 한 신축 미술관은 1890년 증축공사를 한 데 이어 크고 작은 보수를 거쳐 2003년~2013년 10년 동안 3억 7500만 유로를 투입해 대대적인 개보수 공사를 단행했다. 지하층과 지상 3층 규모로 80여 개의 전시실을 갖추고 있다. 전시실은 건물 중앙홀을 기준으로 좌, 우 두 개의 출입구로 나누어져 있다.





대표 컬렉션 렘브란트의 ‘야간 순찰’
12세기에서 20세기 말까지 900년 동안 수집된 총 100만 점의 컬렉션 중 8000여 점의 예술품과 유물을 80여 개의 전시실에서 전시하고 있다.
특히 17~18세기 네덜란드 황금 시기 작품들을 포함해 15세기~19세기 네덜란드 회화를 폭넓게 소장하고 있다. 네덜란드 회화 컬렉션의 하이라이트는 렘브란트~할스~페르메이르로 이어지는 바로크 미술 3대 거장들의 걸작이다. 유화 작품과 데생 등 250점이 넘는 반 고흐 컬렉션도 빼놓을 수 없다.
회화 외에 조각, 판화, 장식예술, 사진, 역사 기록물, 가구, 보석, 금은 세공품, 도자기, 유리공예 등 다양한 컬렉션도 감상할 수 있다. 지하층에는 12세기~16세기 작품과 스페셜 컬렉션이, 1층에는 18세기와 19세기 미술품들이 전시돼 있다. 2층은 17세기, 3층은 20세기 컬렉션으로 꾸며져 있다. 미술관 내부에 네덜란드 최대 규모의 미술사 사료와 서적들을 소장한 도서관도 있다.
‘야간 순찰’은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을 대표하는 렘브란트의 역작이다. 세로 379.5cm, 가로 453.5cm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이 그림은 17세기 중반 암스테르담에서 활동하던 민병대가 거리 순찰을 위해 막 출발하려는 찰나의 장면을 그린 단체초상화다.
이 그림이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빛을 회화에 이식하는 기법을 규범적인 방식에서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방식으로 전환해 자유분방한 인물들의 개성을 극대화한 점 ▲단체초상화임에도 수십 명의 등장인물 동작 하나하나가 경직되지 않고 모두 제각각이면서도 치밀한 구도에 의한 통일된 안정감 ▲일렬로 줄지어 근엄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전통적인 단체초상화 제작 관행을 타파한 점 ▲북과 총, 칼, 창을 들고 있는 대원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듯한 생생한 현장감 등이다. 빛에 대한 화가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단체초상화의 신기원을 이룩한 걸작이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우유를 따르는 하녀’
페르메이르는 흔하고 익숙한 사물과 행위도 빛의 은덕을 입고 진인사(盡人事) 하면 지고지순한 감동을 안길 수 있다는 탁월한 발상과 예술적 솜씨를 증명한 네덜란드 풍속화의 대가다. 그 정점에 있는 그림이 ‘우유를 따르는 하녀’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평범한 중산층의 한 가정 부엌에서 우유를 따르며 식사 준비에 열중인 하녀의 모습을 그린 장면이다. 무심코 우유를 따르는 일에만 집중하는 하녀의 표정과 모습은 구도자의 수행처럼 일체 동요도 없이 정적이다. 매사 최선을 다하는 진정성으로 무아지경에 빠진 하녀의 자세는 하찮은 가사노동의 가치를 신성하고 존엄한 의식의 영역으로 치환한다. 항아리 모양 주전자에서 흘러내리는 우유 소리만 쪼르륵하고 들릴 뿐, 그림 속 모든 것이 정적에 쌓여 있다. 하녀와 하녀 뒤의 벽과 창문에서 보이듯, 빛을 그림의 주체로 예우한 것도 이 그림이 최초다.


박인권 문화 칼럼니스트_ PIK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전 <스포츠서울> 문화레저부 부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팀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와 사랑에 빠진 그림> <미술전시 홍보, 이렇게 한다>, 미술 연구용역 보고서 ‘미술관 건립·운영 매뉴얼’ ‘미술관 마케팅 백서’ 등이 있다.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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