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일맥상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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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어느 여배우가 에세이집을 출간했다. 나는 친구 손에 이끌려 그녀의 북토크 현장을 찾았다. 그런데 그녀는 연기에만 소질이 있을 뿐 말하는 데에는 별다른 재주가 없었다.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는지 여기저기에서 인중을 늘여가며 하품을 참고 있는 독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깜짝 게스트가 등장했다. 다름 아닌 가수 정용화였다. 예상치 못한 연예인의 등장에 사람들이 자지러졌다. 문학의 힘이 이리도 허약하다니! 그러한 현실이 못내 안타까웠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 나였다.
그런데 얼마 전,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맞춤법 강연을 진행하던 중 과보를 치렀다. 첫 강연인지라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했건만 “선생님! 집에 빨리 가고 싶어서 그런데 일찍 끝내주실 수 있을까요?” 하는 당돌한 요구에 그만 말문이 막혀버린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비장의 무기인 ‘카라멜콘 땅콩’을 꺼내 들었다. “자, 과자 이름에서 어디가 틀렸는지 맞혀 볼까요?” 아이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캬라멜!”, “갸라멜!”, “퀘러멜!” 등 기상천외한 대답을 내놓기 시작했다. ‘뿌셔뿌셔’, ‘빠다코코낫’, ‘꼬깔콘’과 ‘누네띠네’를 골고루 준비한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루하다고 아우성치는 아이들의 입을 막을 길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
아이들에게 탈탈 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과자만도 못한 말솜씨를 지녔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몰려왔다. 강연 일정은 줄줄이 잡혀 있는데 어찌하면 좋을까. 해결책을 궁리한 끝에 강사 하면 떠오르는 사람, 김미경의 영상을 찾아봤다. 작곡과를 졸업한 후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던 그녀에게 난데없는 강연 제의가 들어왔단다. 처음에는 손사래를 쳤으나 거듭되는 요청을 거절하지 못해 강연을 수락했는데 음악을 작곡하듯 하고자 하는 말을 구조화해 모조리 외웠다는 것이 아닌가. 아아, 그러니까 글로 치자면 기승전결을 구성하는 것처럼 강연에도 일정한 짜임새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구나! 띵하게 아팠던 머릿속에 댕 하는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는 순간이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과도 같은 실마리를 꽉 붙잡고서 강연을 새로 구성해 나아갔다. 이전에는 ‘본격 강연! 본격 강연! 본격 강연! 어라, 이게 아닌데…’ 순으로 진행했다면 이번에는 맞춤법과 관련된 황당한 경험을 나누면서 주제를 일으켜 세우고, 앞선 이야기를 이어받아 맞춤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본격적인 강연에 돌입한 다음, 분위기를 전환할 겸 과자를 꺼내 혼을 쏙 빼놓고서, 약간의 교훈을 곁들여 유쾌하게 마무리를 지으면 되겠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작은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다음 강연 대상인 중학생 남자아이들도 과자를 좋아할까 살짝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세상만사 일맥상통하니 그들이라고 다를쏘냐.
이주윤
글을 쓰고 그림도 그린다. 어쩌다 보니 맞춤법을 주제로 한 책을 여러 권 출간했다. 국어사전 속에서 온종일 헤매는 일이 싫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체질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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