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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지 않음으로써 만드는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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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저무는 12월 끄트머리, 분명히 있는 것 같지만 절대로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끝’ 혹은 ‘마지막’이 그렇다. 세상에 그런 건 없다. 바꾸어 생각하면 끝과 마지막은 처음 같은 시작,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북위 34도 17분 38초,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갈두마을. 사람들이 ‘땅끝마을’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그곳 달마산 사자봉에 ‘토말비(土末碑)’가 세워져 있다. 한반도 국토 최남단임을 알리는 표식이다. 비록 육지 길은 끝나지만 그렇다고 진짜 끝은 아니다. 거기서 다시 바닷길이 시작되니까.
실제로 완도, 보길도, 노화도 같은 섬으로 떠나는 배가 그곳 선착장에서 출발한다. 힘겹게 오른 높은 산 정상이 결코 최종 목적지일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산꼭대기는 새로운 출발지, 하산을 위한 또 다른 처음이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 응축과 확산, 입체와 평면, 안과 밖, 밝음과 어둠, 가벼움과 무거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지 않다. 그저 상대적일 뿐, 결국 한몸인 셈이다.




세상의 끝에서 시작된 프로젝트
‘세상의 끝’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일생일대 프로젝트를 시작한 작가가 있다. 오래전 고국을 떠나 타국에서 살며 활동하는 작가 윤희다. 프랑스 남부 산골 오지에 그의 작업실이 있다. 현지 사람들이 ‘세상의 끄트머리’라고 할 만큼 외진 곳이다. 파리에 살던 윤희는 1997년 처음 이곳을 발견하곤 직감적으로 확신했다.
이듬해 지어진 지 200년이 넘어 폐허로 남은 축사 건물을 얻었다. 기둥만 남고 다 허물어진 상태였다. 다시 돌을 쌓고 지붕을 얹어 작업실 겸 수장고를 만들었다. 자신의 조각-오브제만을 담을 수 있는 특별한 수장고, 즉 작품이 담긴 ‘커다란 그릇’ 같은 건축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앞서 1995년, 그는 작업노트에 이렇게 기록했다.
“자연경관 속에 자연과 내용물의 연결 장치 기능을 하는 일종의 테두리 안에 내 조각물을 설치하고 싶다. 조각물의 결집이 총체를 이뤄 일관성 있는 해석을 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뿐인 작품(une seule oeuvre)’을 하는 것이 이제 내게 최상의 방법이다. 지역은 트여 있고 황량하며 되도록 외지고 불모의 돌투성이인 곳이어야 한다. 건축된 공간은 이런 지역과 하나가 되도록 풍부한 자연광, 적절한 규모, 소박함을 추구해야 한다. 일반적인 건축물이 갖춘 비품과 설비는 완전히 배제하고 오직 바닥과 벽, 창문 같은 골격만을 중시해서 지어질 것이다.(중략) 작품은 오브제의 이미지를 표현하지 않는다. 작품은 그것 자체를 나타낸다. 작품은 관람자가 공간 속에서 움직일 때 생명력을 가지며 이러한 상황 전체가 작품을 존재하게 한다. 나의 프로젝트는 최상의 공간-건축물을 지어 그 공간에 조각물을 영구적으로 설치하는 것이다. 이 집합체는 내 작품의 보편적인 감각과 일치하는 지역에 놓이도록 계획할 것이다.”
이처럼 윤희는 자신의 조각(작품)과 그것을 담고 있는 공간의 완벽한 조화와 통합을 꿈꾼다. 조각작품이란 오브제와 그것을 품고 있는 공간이 서로 호응해야 완성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간은 조각을 포함하고, 조각은 공간에 포함되어야만 한다. 외부 공간과 내부 금속작품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것. 이것이 바로 윤희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예술의 지향점이다.




떠난 곳으로 다시 돌아오다
윤희는 1950년 개성에서 태어났지만 웬만한 서울 토박이 못지않다. 6·25전쟁 때 서울로 피란 내려와 적선동에서 자랐다. 지금 세종문화회관과 정부종합청사가 있는 곳이다. 집에서 걸어서 덕수초등학교를 다녔다. 이화여중·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서양화과에 입학해 1974년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6년 프랑스에 정착하면서 본격적으로 금속 입체 작업을 시작했다. 작품은 크게 세 종류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무거운 쇳덩어리 시리즈. 주물공장이나 제철소, 조선소 같은 산업 현장에서 발견한 원초적 형태의 금속 덩어리다. 아직까지 대부분 프랑스 남부 작업실에 보관되어 있다. 둘째, 얇은 껍질 같은 금속을 여러 겹 겹쳐서 형태를 만든 시리즈다. 용광로에서 용해된 뜨거운 액체상태 금속을 드로잉하듯 틀 안에 던지고 뿌려서 만든다. 금속 용액이 굳으면서 정지되는 순간을 포착해 원하는 모양으로 만든다.
세 번째는 평면 회화작업 시리즈. 검은색 드로잉 작업이 대표적이다. 쇳덩이처럼 무겁고 응축된 에너지가 한순간 폭발하는 듯하다. 가볍지만 강렬한 이미지가 평면 위에 펼쳐진다. 이 밖에도 우연과 즉흥이 결합 된 독특한 제작방식을 보여주는 시리즈가 많다. 윤희는 지금까지 주로 유럽 여러 도시에서 활동하면서 가끔 한국 전시에 참여했다. 최근엔 대구 인당미술관과 리안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앞으로 본격적으로 한국에서 자주 작품을 선보일 계획이다.


이준희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_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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