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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랫말은 조용필을 통해 승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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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편(20회)에 이렇게 썼다.

“조용필의 1집 앨범에서부터 2013년 ‘바운스’가 실린 19집 앨범 ‘헬로(Hello)’까지 188곡 에는 총 76명의 작사자가 참여했다. 조용필은 이 중 44%에 달하는 82곡을 작곡했지만, 작사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가 작사·작곡한 노래는 ‘꿈’ 등 6곡뿐이다.

조용필 노래를 빛낸 가장 중요한 작사가는 네 명이다. 양인자, 하지영, 박건호, 김순곤이다. 양인자 20곡(20회-조용필과 양인자의 운명적 만남), 하지영 14곡, 박건호 14곡, 김순곤 7곡으로 전체의 30%다. 모두 한국 대중가요사에 남는 걸출한 작사가들이다. 문학적 자질이 풍부한 이 네 명이 쓴 노랫말은 참신하고 파격적이었다. 그래서 대중의 큰 사랑을 받은 노래가 많다.”

조용필 ‘전담 작사가’ 하지영-‘친구여’ ‘허공’ ‘여행을 떠나요’

강렬한 노랫말의 양인자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조용필의 히트곡 중 가장 많은 노랫말을 쓴 이는 하지영이다. 1983년 조용필 5집 ‘친구여’로 작사가로 데뷔한 이래 14곡이 그의 손 끝에서 태어났다. 모두 80년대 노래다. ‘조용필 전담 작사가’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대표작은 ‘허공’, ‘여행을 떠나요’, ‘어제 오늘 그리고’,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미지의 세계’, ‘들꽃’, ‘그대여’ 등이다. 이밖에 ‘청춘시대’, ‘사랑해요’, ‘나그네 바람’, ‘차라리 학이 되리라’, ‘정말 모르겠네’, ‘진실한 사랑’, ‘이별 뒤의 사랑’ 등이 있다.

하지영은 삶의 진지한 의미와 사랑의 비극성, 외로움과 그리움을 시적으로 함축한 노랫말을 썼다.

“어제 우리가 찾은 것은 무엇인가/잃은 것은 무엇인가/남은 것은 무엇인가/…/어떤 꽃은 지고 어떤 꽃은 피고 있네/…/여기 길 떠나는 저기 방황하는 사람아/우린 모두 같이 떠나가고 있구나” (‘어제 오늘 그리고’)

“꿈은 하늘에서 잠자고/추억은 구름 따라 흐르고/친구여 모습은 어딜 갔나 친구여” (‘친구여’)

“사랑했던 마음도 미워했던 마음도/허공 속에 묻어야만 될 슬픈 옛이야기/스쳐버린 그날들 잊어야 할 그날들/허공 속에 묻힐 그날들” (‘허공’)

“지금 내 곁에 있는 모든 것들이/정녕 기쁨이 되게 하여 주오/그리고 사랑의 그림자 되어 끝없이 머물게 하여 주오”(‘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작사가 하지영이 지난 2017년 11월 3일 오후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은 뒤 소감을 밝히고 있다.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하지영(본명 하명숙·65)은 시인이다. 2020년 ‘꿈을 만드세요’(문화발전소)란 제목의 시집을 냈다. 남편은 국내 녹음 예술의 산증인인 이태경 서울사운드 대표. 지구레코드 녹음부장일 때 조용필 1집부터 9집까지 녹음을 도맡았는데 그 인연이 아내에게까지 닿았다. 하지영이 처음으로 작사한 불멸의 명곡 ‘친구여’는 1996년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최초의 대중가요다.

동심을 승화한 김순곤-‘고추잠자리’ ‘못 찾겠다 꾀꼬리’ ‘바람의 노래’

다양한 장르를 오고 간 조용필의 노래 중 동요 같으면서도 인생에 대한 심오하고 불가해한 통찰이 담긴 특별한 노래가 두 개 있다. ‘고추잠자리’(18회-엄마야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와 ‘못 찾겠다 꾀꼬리’다. 두 노래의 작사가는 김순곤이다.

‘고추잠자리’는 보고픔과 그리움과 슬픔의 정체를 아이의 입을 빌려 ‘엄마’에게 묻는, 어떤 초월적 세계에 대한 기다림과 그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상실감을 노래했다. 그 어린아이는 ‘못 찾겠다 꾀꼬리’에서 술래가 된다.

나는 영원한 술래다. 어른이 되어서도 술래다. 이제는 찾을 때도 됐고 보일 때도 됐는데 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까. 그 많던 어린 날의 꿈은 어디로 꽁꽁 숨어버렸나. 난 잃어버린 그 꿈을 찾아 헤매는 영원한 술래다.

김순곤(63)은 유년의 추억, 마치 정지돼 있는 것 같은 그 한순간을 성인 대중가요에 소환해 아름답고 순수하고 서정적인 정서로 승화한 탁월한 작사가이다.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세월 가면 그 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수많은 후배가수들이 리메이크한 또다른 명곡, ‘바람의 노래’(19회-바람이 불어오면 귀 기울여봐)에서는 동심을 훌쩍 뛰어넘어 성숙해진 어른의 관조를 드러낸다.

2015년 10월 KBS2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에 전설로 출연한 작사가 김순곤.2015년 10월 KBS2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에 전설로 출연한 작사가 김순곤.

김순곤은 조용필 앨범에 7곡의 가사를 썼다. 산업미술을 전공한 그는 우연히 라디오 프로그램의 가사 공모전에 ‘고추잠자리’를 투고했는데 조용필이 마음에 들어해 가져가 곡을 붙였다. 1000곡이 넘는 노래를 작사한 그의 데뷔곡이 되었다.

당대의 최고 작사가 박건호-‘단발머리’ ‘모나리자’ ‘마도요’

조용필의 초기 노래에서 ‘단발머리’를 빼놓을 수 없다. 대마초 해금에서 막 풀려난 1980년 초, 조용필의 위대한 컴백과 가왕의 출현을 만천하에 알린 한국가요 사상 최초의 밀리언셀러 ‘조용필 1집’이 나왔다. 앨범 전면 첫 트랙으로는 ‘창밖의 여자’가, 후면 첫 트랙으로는 ‘단발머리’가 수록됐다.

“뿅뿅” 쏴대는 아날로그 신디사이저 반주 하나만으로도 이 노래는 영원하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의 개회식 때, EDM 풍으로 편곡돼 선수단 입장곡으로 쓰이기도 했다.

고향인 원주 도심에 있는 박건호 공원. 3000여 곡 노랫말을 쓴 그는 국민작사가로 불린다. (인터넷 커뮤니티)고향인 원주 도심에 있는 박건호 공원. 3000여 곡 노랫말을 쓴 그는 국민작사가로 불린다. (인터넷 커뮤니티)

3000여 곡을 작사한 박건호(2007년 작고)는 당대 최고의 작사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고향인 강원도 원주에는 박건호 공원이 있다. 박건호는 조용필에게 ‘단발머리’ ‘모나리자’ ‘마도요’ ‘눈물의 파티’ 등 12곡의 가사를 주었다. 그의 최고 히트곡은 이용이 부른 ‘잊혀진 계절’,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이다.

그는 섬세한 여성적 감성으로 사랑과 이별, 일상적 소재를 노랫말로 옮기는 데 탁월했다.

“그 언젠가 나를 위해 꽃다발을 전해주던 그 소녀/오늘따라 왜 이렇게 그 소녀가 보고 싶을까/비에 젖은 풀잎처럼 단발머리 곱게 빗은 그 소녀/반짝이던 눈망울이 내 마음에 되살아나네/…/못 잊을 그리움 남기고/그 소녀 데려간 세월이 미워라”

‘비에 젖은 풀잎’과 ‘단발머리 소녀’, 그 이미지의 비유는 얼마나 신선한가. 대중가요 소비층을 처음으로 10대까지 내려가게 한 노래다.

그 소녀 데려간 세월이 밉듯이 세월을 이기는 사랑은 없다. 조용필 콘서트의 대미를 주로 장식하는 ‘모나리자’는 어떤가. 모든 것 다 주어도 그 마음을 잡을 수 없는 사람, 미소도 눈물도 없는 당신, 끊임없이 속삭이며 그대 곁에 머물지만 내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당신, 추억만을 간직한 채 떠나기는 아쉽다고 말하지만 노래는 역설적으로 경쾌하다.

가사의 최종 텍스트는 조용필

조용필은 가사를 채택하는 심미안이 뛰어났다. 작사가에게 의뢰했던 가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 번이라도 다시 써오라고 했다.

그가 부른 노래의 가사는 70년대의 통속성을 극복했다. 어휘와 표현과 정서가 그랬다. 신선하고 문학적이고 철학적이고 진솔했다. 선정성과 폭력성은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억압과 저항의 시대인 70~80년대 몇몇 가수들, 김민기나 한대수, 정태춘, 송창식 등의 노래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가 전혀 없다.

그의 노랫말이 말하는 것들은 대체로 인생, 사랑, 이별, 고독, 슬픔, 꿈, 추억, 자유, 기다림, 친구, 탈피가 아닌 극복, 포기가 아닌 의지, 동심 같은 일반의 정서다. 퇴락한 신파조가 아니라 시대 분위기를 쫓아간 모던한 정서다. 그래서 그의 노래를 들으며 우리는 분노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노랫말에 녹아들어가 위안과 평화와 삶의 의지를 느낀다. 그래서 그는 영원한 ‘오빠’다.

조용필이 쉼 없이 추구한 실험적 장르에 어울리는 개성적이고 다양한 노랫말을 써 준 위의 (양인자 포함) 네 작사가가 있었기에, 그는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국민가수로 영원히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조용필은 그 자체로 ‘텍스트(text)’다.

“많은 작사가들이 노랫말을 썼지만 조용필 음악의 최종적 입법자는 조용필 자신이다. 매너와 창법, 장르 수용 능력, 가사와 곡조는 모두 조용필로 귀납됐다. 가사를 따라 부른 게 아니라 조용필을 통해 육화되고 승화됐다.” (‘문학으로 읽는 조용필’, 유성호 한양대 교수)

한기봉

◆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과 신문윤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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