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가 떠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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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만 더 ‘누가 어디서 포즈를 취했다’는 이딴 한심한 사진설명을 쓰면 앞으로 네가 어떤 포즈도 취할 수 없게 해줄 거다.”
18년 혹은 19년 전쯤, 문화부 막내 기자 시절이었다. ‘배우 A가 기자회견을 마치고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라는 사진설명을 썼다가 선배에게 된통 욕을 먹었다. 대체 뭐가 문제라는 것인가. 얼굴을 붉히고 있는 내게 그는 또박또박, 짧고도 빠르게, 몇 마디를 더 했다. “당연히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했겠지, 그럼 포즈를 접었겠냐.”
그날 이후 그런 식의 사진설명은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요즘 같으면 ‘꼭 저렇게 말해야 하나’라는 항변이 나올 것이고 나 역시도 그땐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지만 그날 그가 쏘아댔던 잔소리는 이후 내 몸속 어딘가 깊이 박혀버렸다. ‘사진설명 한 줄도 생동감 있게 쓸 것. 뻔한 소리는 나열하지 말 것. 간결하고도 재치 있게 쓸 것. 문학적으로 쓸 수 있다면 더 좋다.’ 이 원칙을 터득했다. 이후로도 그는 이런 이유로 ‘싫은 사람’이자 ‘대단한 사람’이었고 ‘지독하게 귀찮은 인간’이면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선배’였다.
속 터지는 기억도 있다. 한때 그는 문화부 방송팀장이었고 나는 팀원이었다. 각종 방송 관련 기사를 쓰는 게 그와 나의 담당이었다. 문제는 그는 TV를 안 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만날 록과 클래식만 들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드라마 ‘주몽’으로 절정의 인기를 자랑하던 배우 송일국 관련 기사를 썼을 때의 일이다. 기사를 검토하던 그가 허공에 대고 갑자기 큰소리로 외쳤다. “송일국이 어느 프로그램에 나오는데?!” 나 역시 큰소리로 대답했다. “‘주몽’입니다!” 그가 살짝 짜증을 냈다. “아니, 그래서 ‘주몽’에서 걔 역할이 뭔데?” 난 잠시 움찔하다 대답했다. “‘주몽’에서 ‘주몽’이죠….” 그 순간 우리 대화를 숨죽여 듣고 있던 사무실 사람 모두가 “와!”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순간 기분이 몹시 좋았다. TV도 안 보는 대단한 방송팀장을 모시고 사는 내 심정을 세상 모두가 알아준 것 같았다.
그래도 종종 마음속으로 무릎을 꿇었다. 마감시간에 쫓겨 급히 기사를 쓰다 보면 거친 원고를 그냥 넘길 때가 있다. 그때마다 그는 기막힌 후각을 타고난 마약탐지견처럼 그 부분만 찾아내 매끈하게 다듬었다. 단 몇 분 만에 동물적으로 기사를 읽고 글에서 겉도는 까끌까끌한 부분만 떼어낸 뒤 기사를 다 넘기고는 혼자 “킁” 하고 콧소리를 냈다. 난 그가 “킁” 소리를 낼 때마다 고쳐진 기사를 확인하고 탄복했다. 회사에서 권위라는 건 직급이나 동료·후배에게 던지는 막말과 호통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결국 일하는 순간에 보여주는 판단력과 능력에서 나온다는 것도 이때 배웠다.
그가 얼마 전 회사를 그만뒀다. 본래 많은 이들이 들고 나는 것이 조직이지만 후배에게 뭔가를 가르쳐주려고 좌충우돌했던 마지막 세대의 사람, 그가 떠난다니 며칠은 장맛비처럼 쓸쓸했다. 난 이제 누구에게 욕을 먹고 글을 더 배울까. 나의 후배들은 그런 이상하고 지독하지만 대단한 사람을 더는 볼 수 없겠지. 덩그러니 앉아 그런 생각을 했다. 비가 내린다.
송혜진
장래희망이 ‘퇴사’인 20년 차 신문기자. 어쩌다 이 일을 하게 됐나 싶다가도 그래도 ‘질문하는 일’을 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종종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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