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만찬’ 한 점으로 모두가 찾는 성당이 되다 > 정책소식 | 정보모아
 
정책소식

‘최후의 만찬’ 한 점으로 모두가 찾는 성당이 되다

작성자 정보

  • 공감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btn_textview.gif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아 성당 ©Giovanni Dall'Orto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문화의 산실이자 14~16세기 르네상스의 본고장이다. 나라 전역에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53건의 유네스코 선정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수도 로마에 이어 이탈리아 제2의 도시인 밀라노에도 널리 알려진 문화유산이 있다.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아 성당인데 500년을 훌쩍 넘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이다. 1980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 성당은 그 자체의 역사성과 종교적인 의미만으로도 기념비적인 건축물이지만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단 한 점의 그림 덕분에 역대급의 브랜드 경쟁력으로 소문난 곳이다.
단 한 점의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가 그린 ‘최후의 만찬’(1495~1498)이다. 그림을 그린 주인공이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천재 화가라는 점과 예수를 주제로 다룬 작품 중 첫손에 꼽히는 불후의 명작이라는 데에 이견의 여지가 없다.
다빈치는 두 차례에 걸쳐 밀라노에 23년간 머물렀는데 이때 그가 팔방미인형 전인적 인간임을 보여주는 빼어난 저술과 과학적 업적을 남겼다. 다빈치는 밀라노와 인연이 깊다. 인연의 연결고리는 밀라노 공국의 4대 스포르차 군주 루도비코 스포르차(1452~1508, 재위 1494년 10월~1499년 9월, 1500년 2월~1500년 4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파괴된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아 성당

패션과 예술, 축구의 도시 밀라노
밀라노는 유행을 선도하는 세계 패션의 중심지이자 이탈리아 경제의 중심 도시다. 밀라노에 본사를 둔 프라다와 베르사체, 피렌체 기반의 페라가모, 프랑스 브랜드 카르티에 등 명품매장들이 밀라노 시내 패션 거리인 몬테 나폴레오네와 델라 스피자에 밀집해 있다.
유럽 교통의 관문이기도 하며 높이 108.5m로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두오모 대성당도 밀라노 도심 한복판에 우뚝 서 있다. 후기 고딕 양식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밀라노 두오모 대성당은 600년 가까운 건축 기간으로도 유명하다. 1386년 최초 설립 공사를 시작해 19세기 초 완공됐으나 20세기 들어 진행된 세부 장식 작업에 이어 1965년 1월 6일에야 출입구가 마지막으로 완성됐다.
135개나 되는 첨탑과 외관을 장식하는 3000개를 넘는 입상, 길이 157m, 폭 92m의 웅장한 규모에 더해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내부 장식은 예술적 조형미의 극치라 불린다. 1805년 나폴레옹 1세(1769~1821)가 이탈리아 국왕 즉위식을 한 장소도 이곳이다.
또 하나, 15세기 밀라노 군주 스포르차 가문의 성채(城砦, 성과 요새)였던 스포르체스코성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밀라노 외곽 셈피오네 공원에 있으며 14세기 밀라노를 통치하던 비스콘티 가문이 세운 르네상스식 갈색 궁전이었으나 뒤이어 권력을 장악한 스포르차 가문이 1450년부터 성채로 개축한 것이다. 다빈치와 브라만테(1444~1514) 등 당대 최고의 건축가들이 설계에 참여했다. 성채 안에 정원이 있고 고미술과 악기 박물관, 가구 박물관, 르네상스 회화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다. 죽기 3일 전까지 작업에 매달렸던 미켈란젤로 최후의 조각상이자 미완성으로 남겨진 론다니니 피에타도 이곳에 있다.
다빈치의 천재성을 체험할 수 있는 레오나르도 박물관과 1400년대부터 1800년대까지 이탈리아 미술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는 브레라 미술관, 세계 3대 오페라 하우스인 라 스칼라 극장도 밀라노에 있다. 하나 더, 1899년에 창단한 세계적인 축구 클럽 AC밀란과 1908년에 출범한 인터 밀란 두 구단의 연고지도 밀라노다. AC밀란 본사 건물인 카사 밀란 내에 120년 구단 역사의 발자취를 볼 수 있는 몬도 밀란 박물관이 있다.

▶밀라노의 명소 두오모 대성당 ©Jiuguang Wang

밀라노 문예부흥 주역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작
14세기부터 15세기 중반까지 125년간 밀라노를 지배했던 비스콘티 가문의 마지막 밀라노 공작 필리포 1세 마리아 비스콘티(1392~1447, 재위 1412~1447)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그의 사위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1401~1466, 재위 1450~1466)가 권력을 이어받았다. 스포르차 가문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프란체스코 1세의 둘째 아들이다.
예술적 안목이 뛰어났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루도비코는 다재다능한 다빈치의 천재성을 한눈에 알아보고 전폭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는 등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을 늘 곁에 두었다. 밀라노를 당대 최고의 문화도시로 만들고자 했던 그는 밀라노 두오모 대성당과 스포르체스코성 건립에 참여했으며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아 성당 건축과 증축을 주도하는 등 밀라노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유산 곳곳에 자신의 족적을 남겼다.
특히 자신과 동갑인 다빈치를 예술적 동지로 무한신뢰해 성당 옆 수도원 식당 벽을 장식할 벽화를 직접 주문했는데, 그게 바로 ‘최후의 만찬’이다. 다빈치의 재능도 놀랍지만 다빈치를 알아보고 재능을 꽃피우도록 뒤에서 밀고 앞에서 끌어준 루도비코의 통찰력과 심미안도 놀랍다.
이토록 문화예술 부흥에 지극정성이었던 루도비코는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승부사였다. 혈육 간의 비극은 여덟 살 위 친형으로 2대 스포르차 군주 갈레아초 3세 마리아 스포르차(1444~1476, 재위 1466~1476)가 32세 때 암살당하면서 시작됐다.

▶15세기 밀라노 군주 스포르차 가문의 성채였던 스포르체스코성 ©Dan Kamminga│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아 성당의 건축과 증축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아 성당은 프란체스코 1세 재위 말기인 1463년 공사를 시작해 그의 아들 루도비코가 실질적으로 밀라노를 통치하던 1490년 완공됐다. 1492년 증축계획이 결정되고 1497년 현재의 형태로 최종 완성됐다. 부자는 남다른 권력욕만큼이나 문화강국을 지향하는 의지도 투철했다.
성당 건립의 첫 단계는 프란체스코 1세가 자신의 사유지 중 일부를 도미니코 수도회에 기부하면서 출발했다. 높은 첨탑과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특징인 고딕 건축 양식의 거장 기니포르테 솔라리(1429년경~1481년경)가 수도회 측의 의뢰를 받고 설계를 맡았다. 성당은 27년간의 공사 끝에 후기 고딕 양식의 전형으로 모습을 드러냈지만, 완공 9년 전에 사망한 솔라리는 완성된 자신의 역작을 보지 못했다.
성당은 준공된 지 2년 만에 증축작업에 들어가는데 밀라노의 실권자 루도비코가 스포르차 가문의 가족묘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증축공사의 설계자는 르네상스 건축의 선구자로 스포르차 가문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던 도나토 브라만테(1444~1514). 브라만테의 창의적인 건축 감각을 눈여겨봐 온 루도비코가 직접 낙점한 인물이다.
고딕 양식 위주로 지어진 최초의 성당과 달리 브라만테가 책임 설계자로 나선 증축작업은 솔라리 설계안에 담긴 기하학적인 구성을 계승한 가운데 르네상스 건축의 서막을 알리는 독창적인 형식으로 진행됐다. 4개의 아치가 떠받치고 있는 돔 형태를 도입하고 반원형의 아치가 돋보이는 긴 복도, 즉 대회랑(回廊)을 만들어 솔라리의 소 회랑과 동선을 연결했다.
이로써 63m의 길이에 30m의 폭, 14.4m의 높이로 본당과 7개의 예배당, 3개의 회랑을 갖춘 후기 고딕 양식과 초창기 르네상스 양식이 어우러진 역사적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아 성당이 탄생했다. ‘최후의 만찬’ 벽화가 있는 성당 바로 옆 수도원 대식당도 브라만테가 증축했다.


▶이탈리아 화가 프란체스코 포데스티(1800~1895)가 그린 루도비코 스포르차 초상화. 캔버스에 유화, 267×199cm, 1846 ©Molteni&Motta/Universal Images Group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아 성당 내부 ©Davide Papalini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아 성당 옆 수도원 식당 벽화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Dimitris Kamaras│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인류 회화 사상 지존의 찬사 받는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 벽화 한 점의 기념비적인 명화를 보기 위해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아 성당을 찾는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성당 증축공사가 한창이던 1495년, 밀라노 군주 재위 2년째를 맞은 루도비코는 자신의 문화예술계 멘토인 다빈치에게 수도원 대식당 북쪽 벽을 장식할 벽화 ‘최후의 만찬’을 주문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전날 밤 열두 제자와 한 마지막 성찬(聖餐) 장면을 그린 이 그림은 ‘모나리자’(1503)와 함께 다빈치의 천재성을 입증하는 역사적인 그림이다.
524년 전에 그려진 ‘최후의 만찬’이 인류 회화 사상 지존의 찬사를 받는 이유는 구도와 표현 방법, 회화 기법 등에 걸쳐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다빈치는 예수를 중심으로 식탁 양쪽에 제자들을 배치하고 유독 유다만 건너편에 홀로 앉혀 배신자를 의도적으로 고립시킨 전통적인 구도를 따르지 않았다. 대신 식탁 가운데에 자리한 예수 양옆으로 6명씩 일렬횡대를 이루는 파격적인 구성방식을 선보였다.
둘째 이 자리에 배신자가 있다는 예수의 말에 화들짝 놀라 다양하게 반응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무리별 배치방식을 선택한 점이다. 제자들의 제스처, 시선, 대화 장면 등에 따라 3명씩 네 무리로 구분해 슬퍼하고 분노하거나 의심하는 그들의 행동과 표정을 생동감 넘치게 드러냈다.
다른 화가들의 ‘최후의 만찬’과 달리 다빈치는 일체 인위적인 후광을 배제함으로써 만찬 자리의 사실감과 현장감을 고조시킨 것도 눈여겨볼 점이다.
수학적 비율에 따른 원근법과 공간감을 조성해 르네상스 정신을 충실히 실천한 기법도 마찬가지다. 특히 실제 공간 속에 우리가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뛰어난 원근법 효과와 함께 원근법의 소실점을 예수의 머리로 설정해 그림의 주인공이 예수임을 자연스럽게 나타냈다.
마지막으로 이 그림보다 5년 뒤에 제작한 ‘모나리자’를 통해 완벽하게 구현한 스푸마토 기법, 즉 대기원근법도 시도했다. 안개처럼 스멀거리는 공기의 영향으로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의 윤곽은 실제 사물처럼 뚜렷하지 않고 거리가 멀어질수록 희미해진다는 과학적인 묘사 방법을 예수 뒤 창문 밖 배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박인권 문화 칼럼니스트_ PIK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전 문화레저부 부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팀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 미술 연구용역 보고서 ‘미술관 건립·운영 매뉴얼’ ‘미술관 마케팅 백서’ 등이 있다.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최근글


  • 글이 없습니다.

새댓글


  • 댓글이 없습니다.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