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된 청와대, 국격의 상징이자 세계적 명소로 거듭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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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미 제주한라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특임교수 |
청와대 개방에 대하여
서울시 종로구 청와대로 1번지이자 대한민국 영욕의 현대사를 품고 있는 청와대는 오랜 세월 동안 권력의 상징으로 인식됐다. 고려 숙종 때인 1104년 무렵 고려의 이궁(離宮)이 청와대 부근에 들어서면서 역사에 첫 등장 했다. 조선시대에는 1426년 현재 청와대 자리에 경복궁의 후원(뒤뜰)이 조성됐다.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폐허가 돼 270년 동안 방치됐다가 1865년 흥선대원군의 노력으로 다시 지어졌다. 1929년 일제 강점기 시대에 조선총독부 통치 20주년 기념으로 조선 박람회가 경복궁과 옛 후원 자리에서 열리면서 조선시대 및 대한제국 건물들은 대부분 철거됐다. 일제는 조선 박람회 이후 공원으로 남아있던 이곳에 조선 총독의 관사를 지었다. 이후 조선 총독의 관사 일대를 경무대라고 불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이화장에서 조선 총독 관저였던 경무대로 거처를 옮겼다. 경무대는 제4대 윤보선 대통령 시절부터 청와대라는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됐다. 올해 5월 10일을 기점으로 청와대 시대는 1948년 이후 74년 만에 공식적으로 종언을 고하고 국민 품으로 돌아왔다.
청와대의 문턱이 낮아지면서 국민은 청와대를 문화와 예술, 역사를 가득 품은 휴식처로 인식하고 있다. 청와대의 첫 전시로 기자들이 상주하던 공간인 춘추관에서 기획된 장애인특별전은 7만 명이 다녀갔고, 60점 중 25점이 판매되는 성과도 거뒀다. 청와대의 주요 시설에선 매달 문화예술 공연이 성황리에 개최된다. 이제 청와대는 특정인만 드나드는 공간이 아닌 국민의 휴식처이자 명소로 탈바꿈하고 있다.
궁전이 박물관이나 미술관으로 바뀐 유럽의 사례를 통해 청와대가 국민들의 진정한 복합문화예술 휴식처로 거듭나기 위한 제언을 해본다.
#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베르사유 궁전· 러시아 에르미타주 박물관 등 궁전이 박물관이나 미술관으로 변모한 사례
권력자들이 머무르던 궁전이 박물관이나 미술관으로 변한 사례를 우리는 유럽에서 찾을 수 있다. 코로나 이전인 2018년 한 해에만 누적 방문객 수가 무려 1000만 명으로 세계에서 관람객이 가장 많은 박물관인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의 모태는 궁전이다. 이곳은 1193년 필립 오귀스트 2세의 명으로 앵글로노르만 족의 침입을 막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파리시 방어벽 외곽에 착공됐다. 이 요새가 루브르 궁전이 되기까지 수차례에 걸친 건물 확장공사가 이뤄졌다. 루브르 궁전은 어떻게 박물관이 됐을까? 프랑스 대혁명(1789~1974) 기간 중인 1793년 7월 23일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혁명정부가 새 공화국의 탄생을 극적으로 선보일 기회로 루브르 궁전을 국가의 걸작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천명하면서 그해 8월 10일 루브르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이곳에서 관람객들은 기원전 4000년부터 19세기까지 예술사 흐름은 물론 인류 역사를 파악할 수 있다.
파리에서 1시간 30분 정도 떨어진 베르사유시에 있는 베르사유 궁전 역시 궁전에서 박물관으로 역할이 바뀐 사례다. 베르사유 궁전은 1624년 프랑스와 나바라 왕국의 왕인 루이 13세의 사냥용 별장으로 처음 지어졌다. 이후 72년이나 왕좌에 앉은 절대왕권의 상징인 태양왕 루이 14세(1638~1715)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루브르 궁전에서 베르사유 궁전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면서 1662년 증축을 시작해 1715년까지 50년여에 걸친 대공사 끝에 대궁전으로 변모하게 된다. 프랑스의 마지막 왕인 루이 필리프(1773~1850)가 1833년 ‘프랑스의 모든 영광’이라는 모토로 박물관을 베르사유 궁전에 설립하기를 제안하면서 박물관의 역할을 하게 된다. 오늘날 베르사유 궁전은 수많은 이들이 찾는 관광 명소이자 프랑스의 국격을 상징한다.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영국의 대영박물관,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등과 함께 세계 4대 박물관으로 손꼽히는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박물관 역시 궁전에서 박물관으로 변모한 사례다. 이곳은 1754년 표트르 대제의 딸인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1709~1761)가 겨울을 지내기 위한 거처를 건설하라는 명령을 내려 1762년 이탈리아 건축가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가 겨울궁전을 완성한 것이 그 시초다.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의 사후에 친위 쿠데타로 왕위를 차지한 예카테리나 2세(1729~1796)는 당시 갤러리조차 없었던 문화 불모지 러시아에 유럽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역사의 중심 역할을 할 수 있는 강대국으로 만들고자 미술품을 사들였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구입한 명화들을 조용히 감상하기 위해 겨울궁전 앞에 작은 별관을 지었는데 이 별궁을 ‘에르미타주(Hermitage·프랑스어로 은둔처를 뜻함)’라고 불렀던 것이 현재 박물관의 명칭이 됐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1863년부터 국민에 공개됐다.
왕이 머물던 공간은 아니지만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을 비롯한 19세기 인상파 작품이 소장된 오르세 미술관은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 개최를 맞이해 오를레앙 철도가 건설한 철도역이자 호텔이 전신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 철도역 영업을 중단한 이후 이곳의 용도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는데, 1970년대부터 프랑스 정부가 활용 방안을 검토하면서 1986년 미술관으로 개관했다. 오늘날 오르세 미술관은 루브르 박물관, 퐁피두 센터와 더불어 프랑스의 파리의 3대 미술관 중 하나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 궁전에서 박물관으로 변모한 사례가 시사하는 점은?
왕이 거처하던 궁전에서 박물관으로 변모한 사례는 청와대 개방에 시사하는 점이 크다. 한 나라의 권력자가 살던 궁전은 국민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공간이었다. 청와대 역시 마찬가지다. 올해 5월 10일 전까지 국민은 청와대에서 허가하는 특별한 목적 없이 청와대의 문턱을 넘기 어려웠다. 청와대 개방 이후 매일 1만 명에 달하는 국민이 청와대를 찾는 것은 권력자들의 거처가 호기심의 대상이었음을 반증하는 건 아닐까? 여기에는 역사적인 건축물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자 하는 국민의 마음이 반영되어 있다.
무엇보다 루브르 박물관, 베르사유 궁전,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프랑스나 러시아의 국격을 한층 더 끌어올리고 전 세계의 관람객들을 맞이하는 문화 명소가 됐다. 해당 건축물들이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음과 동시에 그곳에서만 관람하고 볼 수 있는 특별한 소장품이 있기에 가능하다. 이른바 문화예술의 요람이라고 할까?
8월 31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춘추관에서 개막한 장애예술인 특별전 ‘국민 속으로 어울림 속으로’에서 발달·지체·청각 장애에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해온 참여 작가들이 손하트를 그리며 기념촬영 하고 있다. (사진=문화체육관광부) |
# 개방된 청와대는 정권이 바뀌어도 계속 국민의 품으로
궁전에서 박물관으로 변모한 루브르 박물관은 프랑스에 다시 왕권이 도래했지만, 궁전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왕권이 약해진 측면도 있지만, 이미 국민들에게 개방이 된 곳을 궁전으로 복원할 명분도 실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청와대 역시 마찬가지다. 청와대를 개방하고 5개월의 시간이 지나간다. 청와대의 내외부 공간이 일반에 개방되었기에 보안상의 이유로 더는 대통령 같은 권력자들이 머무는 공간으로의 의미가 없다. 그렇기에 청와대는 다음 정권과는 상관없이 복합문화 예술 공간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이를 염두에 두어야 장기적인 운영 계획이 가능하다.
청와대가 국민의 진정한 복합문화예술 휴식처로 거듭나기 위해선 뚜렷한 비전과 목표 그리고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투명한 운영과 동시에 국민·전문가의 의견 수렴을 거치고 가칭 ‘청와대 박물관’ 같은 전문적인 기관으로 운영되어야 함이 분명하다.
21세기는 문화 콘텐츠가 중심이 되는 시대다. 청와대에는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있다는 걸 지난 5개월간의 운영을 통해 입증됐다. 그렇다면, 청와대를 전 세계에 내놓아도 될 문화 콘텐츠로 융성하는 건 어떨까? 19세기 지어질 당시만 해도, 파리의 예술가와 시민들에게 숱한 비난을 받았던 에펠탑이 오늘날의 프랑스를 상징하는 것처럼, 청와대가 한국을 상징하는 건축물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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