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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한 기억을 색(色)으로 저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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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하, ‘빛에 대한 연구 : A. R. 6’, 에폭시 레진, 혼합 재료, 90×70cm, 2018 

인간 본질을 둘러싼 논쟁은 막연하다. 이른바 ‘인식론’과 ‘존재론’에 대한 견해 차이는 여전히 팽팽하다. 정신과 육체, 둘로 나눠 인간을 탐구해온 지도 오래됐다.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 가리는 일은 무의미하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처럼 난해하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여러 분야에서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답을 찾고 있다. 과학자는 연구실에서 실험하고, 철학자는 도서관이나 길 위에서 고민하고 사유한다. 예술가는 창작 행위를 통해 이 문제에 맞선다. 이때 ‘형식’과 ‘내용’이라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예술가는 각양각색 매체를 활용한다.
예컨대 문학가는 언어와 문자를 도구로 삼고, 음악가는 악보와 악기로 소리를 구현하고, 무용가는 몸짓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식이다. 미술작가는 유난히 다양한 재료를 다룬다. 붓과 물감뿐 아니라 종이, 나무, 돌멩이, 금속, 흙, 유리 등 세상 모든 만물을 재료로 사용한다.
이것은 형식에 관한 영역이다. 형식은 내용과 더불어 미술작품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다. 물질이 지닌 특성을 살려 유의미한 형식 만들기, 철학적 사유의 결과를 시각화하는 작업이 미술이다. 내용과 형식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작업이 좋은 작품이다. 작가 정정하 작품이 그렇다.


▶정정하, ‘빛에 대한 연구 : A. R. 7’, 에폭시 레진, 혼합 재료, 90×70cm, 2018

재료에 대한 선입견을 깨다
무엇보다 재료가 특이하다. 색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독특하다. 일반적으로 튜브에 들어 있는 물감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공업용 페인트와 건축자재로 쓰이는 화학물질 에폭시 레진을 주로 사용한다. 이런 재료를 쓰게 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부모가 운영하는 페인트 대리점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했지만 한동안 연극 공연 쪽 동네를 기웃거렸다. 무대 만드는 험한 목공 일도 마다하지 않고 배웠다. 페인트칠도 직접 했다. 새로운 재료를 다루는 데 주저하지 않는 태도가 이때부터 몸에 뱄다. 지금 작업엔 그때 경험이 많이 반영됐다. 암중모색의 시기였을까? 돌고 돌아 결국 다시 미술 판으로 돌아왔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대학원에 진학했다. 이를 계기로 수면 아래 갇혀 있던 작업 욕구가 봇물 터지듯 분출됐다.
먼저, 작품 ‘빛에 대한 연구’ 시리즈. 에폭시 레진으로 만들었다. 액체 상태에서 빠르게 굳으며 고체로 응고되는 특성을 지닌 재료다. 표면은 매끄럽지만 마티에르(질감)가 풍부해 보인다. 거친 붓질 자국과 색채의 겹이 쌓이면서 마치 얼음처럼 맑고 투명하게 보인다.
외부 충격에도 잘 깨지지 않는다. 작품 내용은 쉽게 해독할 수 없다. 완전 추상이다. 어떤 대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거나 상황을 재현하지 않아서다. 그런데 정정하는 자신의 작업을 “빛을 모으는 또 다른 방법”이라고 정의한다. “빛을 모아서 가둔다”고도 말한다. ‘빛’은 ‘색’의 이음동의어. ‘색’은 기억을 상징하는 표상이다.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저장하고 기록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어서 ‘라이트 픽셀 Light Pixel’이라는 타이틀을 붙인 작품을 보자. 역시 페인트 가게에서 일하며 만난 손님이 모티브다. 페인트를 사러 온 손님에 대한 기억과 그들로부터 체감한 에너지를 수집하듯 모았다. 페인트 매장에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드나든다. 손님이 원하는 색을 고르면 정정하는 연금술사처럼 그 색상의 페인트를 만들어준다. 투명한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만들 듯 페인트를 이리저리 섞으면 거의 무한대로 다양한 색을 만들어낼 수 있다. ‘조색기(調色機)’라는 기계장치를 이용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정정하, ‘라이트 픽셀 Light Pixel’, 시험관, 건축용 페인트, 가변설치, 2019~2020


▶라이트 픽셀 부분

내용과 형식 사이서 조화와 균형 찾아
색상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많은 감정을 소모한다. 단 한 명도 대충 고르는 경우가 없다. 전문 작업자는 품질과 비용 사이에서 갈등하고 딸과 함께 온 어머니는 감각이 다른 세대 차이 사이에서 고민한다. 오래된 집을 꾸미는 동네 아주머니는 비슷한 색을 놓고 2시간 넘게 고민한다. 창업을 앞둔 청년은 설렘과 희망으로 색을 고른다.
드디어 손님이 최종 선택하면 그 과정을 지켜본 작가는 웃으며 그들이 원하는 색상의 페인트를 빈 깡통에 담아준다. 그러면서 살짝 그 색깔 페인트를 조금 채취한다. 수백 개 시험관에 담긴 형형색색 페인트는 이런 과정을 거치며 채집됐다. 과학 실험실에서 사용하는 시험관과 공업용 페인트가 미술작품으로 거듭 태어난 배경이다.
크기와 모양이 균일한 시험관이 나란히 배열된 점이 주목된다. 단순한 조형 요소를 반복적으로 진열하는 방식은 규칙적이면서 한편으론 가변적이다. 전시 공간에 맞춰 언제든 변형할 수 있다. 설치미술로 확장될 잠재력을 지닌 셈이다. 특별한 의미가 담긴 색을 저장하고 공간을 연출함으로써 완성된다. 내용과 형식 사이에서 조화와 균형을 찾는 여정이다.

이준희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_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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