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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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틀 비가 쏟아진다. 장마철이다. 무논에 모심기를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해의 절반이 지나갔다. ‘쏜살같다’는 표현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언어에는 옛 사람들의 삶에 대한 통찰력이 들어 있다.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간다고 느꼈으면 화살에 비유했을까.
쏜 화살처럼 날아가는 시간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익숙한 문장을 읊조린다.
‘소년이로학난성(小年易老學難成)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
이 문장은 중학교 한문시간에 배웠던 것 같다.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짧은 시간이라도 가벼이 여길 수 없네.’
그때는 몰랐다. 소년이 얼마나 늙기 쉽고 학문은 또 얼마나 이루기가 어려운지. 그때는 그저 ‘易’ 자를 ‘쉬울 이’ 자로 읽어야 할지 ‘바꿀 역’ 자로 읽어야 할지 그것만이 관심사였다. 미래가 구만리 같은 소년 앞에 ‘한 토막의 낮과 밤’은 ‘한평생의 낮과 밤’처럼 길고 길었다. 그 긴 세월 동안 학문을 이루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려울까. 오히려 의문스러웠다.
한문시간에는 칠언절구 중 저 두 수만 배웠기 때문에 그 뒤에 두 수가 더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중에 보니 다음과 같은 문장이 이어져 있었다.
‘못가 봄풀의 꿈에서 채 깨기도 전에(未覺池塘春草夢)/ 섬돌 앞 오동잎 떨어져 벌써 가을이네(階前梧葉已秋聲).’
봄풀이 나는가 싶더니 오동잎 떨어지는 가을이 왔다는 문장은 ‘소년이로학난성’의 관념성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듯 실재적으로 바꿔준다. 주희(朱熹, 1130-1200)가 쓴 ‘우연히 짓다(偶成)’라는 시의 전문이다.
이인문(李寅文, 1745-1821)의 ‘산수도’는 요즘처럼 비온 후에 보면 실감나는 작품이다. 그림 상단에는 두 개의 제시가 적혀 있다. 우측은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의 ‘은자를 찾았지만 만나지 못하고(訪隱者不遇)’의 마지막 구절이고 좌측은 운초산늙은이(雲樵山?)라는 사람의 감상문이다. 두 개의 제시 모두 이인문의 그림을 보고 후대에 쓴 글이다. 감상평이야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니까 여기에서는 두 사람의 감상평은 무시하기로 하겠다. 그림 자체에 집중해보자.
한차례 강한 비가 쏟아지더니 하늘이 말끔해졌다. 비가 개인 후 계곡과 숲 사이에 안개가 내려앉았다. 더위 때문에 후덥지근하던 날씨가 시원해졌다. 초당에 앉은 선비는 나뭇잎 사이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들으며 글을 읽는다.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에 가끔씩 꿩의 울음소리가 얹힌다. 한 마리가 울면 수십 마리가 일제히 따라 우는 개구리 울음소리도 글 읽는 소리에 장단을 맞춘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오두막집의 사립문 안으로 촌로가 이끄는 소의 워낭 소리가 스며든다. 이 멋진 풍경을 두고서 선비는 고개 한 번 드는 일 없이 글 읽기에 여념이 없다.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전에 이 그림을 봤을 때는 그림 속 선비가 참 운치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비가 개인 후의 풍경이 얼마나 멋진데 그 풍경을 무시하고 책만 읽을까. 책은 언제든지 읽을 수 있지만 비온 후의 풍경은 자주 볼 수 없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했다. 인생이 구만리 같은 소년 앞에는 넘쳐나는 것이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겨진 시간이 구만리처럼 길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생겨나면서부터는 그림 속 선비의 조바심이 조금씩 이해됐다.
이를테면 주희가 ‘권학문(勸學文)’에서 ‘해와 달은 무심히 흐를 뿐 세월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日月逝矣 歲不我延)/ 오호라 늙었구나! 이 누구의 허물인가(嗚呼老矣 是誰之愆)’라고 했을 때의 탄식을 선비도 오늘 아침 똑같이 되풀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해의 절반을 넘기고 나니 세월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주희의 가르침이 자꾸 나의 발목을 붙잡는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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