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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한 남자는 명문대를 졸업했다. 눈이 높아 중소기업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대기업에는 지원하는 족족 떨어졌다. 그렇게 백수로서 충실히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는 선배가 창업한 교육 관련 회사에 합류했다. 그의 역할은 다름 아닌 취업 준비생을 위한 자기소개서 첨삭!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백수였던 그가 돌연 남의 자기소개서에 훈수를 둔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세상에 얼마나 많은 비전문가가 판을 치는지 알게 된 동시에 본인을 전문가라 칭하는 사람을 향해 의심의 눈길을 보내게 됐다. 요리 전문가라며 삭발한 사람에게 ‘혹시 그냥 탈모 아닐까?’, 명상 전문가라며 눈을 감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냥 자는 거 아니야?’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런 내가 자승자박의 상황에 놓이게 됐다. 얼마 전에 출간한 책과 관련된 강연 요청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난 글을 쓰는 사람일 뿐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나더러 강연을 하라니. 사람들 앞에만 서면 겨드랑이에서 땀이 폭포처럼 흐르고 마이크만 잡으면 어미를 찾는 새끼 염소처럼 목소리가 떨리는 나더러 강연을 하라니! 이런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뭔가 통달한 척 떠드는 이중적인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하기 싫은 일은 거절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도서 판매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일이라며 출판사에서 특별히 부탁해왔기에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강연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던 중 취미로 그림을 그리던 내게 출판 삽화 작업이 맡겨졌던 옛일이 떠올랐다. 최선을 다해 작업에 임했지만 그렇게 완성된 그림은 이리 보고 저리 봐도 형편없었다. 친구는 부끄러워하다 못해 괴로워하는 나에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너한테 일을 맡기고 돈을 주는 건 그럴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야”라며 격려를 전했다. 그 말이 진짜일까 고개를 갸우뚱했던 것도 잠시. 그림을 그리고 돈을 받고, 또다시 그림을 그리고를 거듭하며 돈을 받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괴로운 마음이 시나브로 사그라들었다. 게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 실력이 늘어 제법 그럴싸한 그림을 그리게 됐다.
그래, 처음부터 전문가처럼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강연할 기회가 생겼다는 건 나에게 그럴 만한 가치와 가능성이 잠재돼 있다는 뜻일 테니 이참에 발굴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터이다. 하루라도 빨리 창피해야 하루라도 빨리 성장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출판사에 강연을 수락하는 이메일을 보내고 서둘러 대본을 작성했다. 강연이라는 세계에 이제 막 발을 들인 비전문가이니만큼 어설픈 티를 숨길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마음만은 전문가처럼, 준비했던 말을 줄줄 읊을 수 있도록 틈날 때마다 대본을 달달 외워야겠다. 줄기차게 떠드는 내 모습을 본 청중이 ‘혹시 그냥 수다쟁이 아니야?’ 하는 의심의 눈길을 보낼 정도로 말이다.


이주윤
글을 쓰고 그림도 그린다. 어쩌다 보니 맞춤법을 주제로 한 책을 여러 권 출간했다. 국어사전 속에서 온종일 헤매는 일이 싫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체질인 듯싶다.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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