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 이곳에서 영원히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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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평등’, ‘박애’의 기치 아래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이 일어났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1889년, 파리 서쪽 지역에 만국박람회가 열리면서 하늘을 찌르는 듯한 에펠탑이 세워졌다. 파리의 상징 에펠탑은 파리 시가지 웬만한 곳에서 다 보인다.
그런데 에펠탑이 잘 보이지 않는 파리 시가지의 동쪽 지역에는 고개를 들게 하는 에펠탑과는 달리 고개를 숙이게 하는 명소 페르-라셰즈가 있다. 이곳은 다름 아닌 네크로폴리스, 즉 ‘죽은 자들의 도시’다. 로마제국 시대의 초기 크리스트교 신자들은 ‘죽은 자들의 도시’를 코이메테리움(coemeterium)이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잠자는 곳’이란 뜻으로 ‘공동묘지’를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cimitero(치미테로), 프랑스어 cimetière(심티에르), 영어 cemetery(세머테리)의 어원이 된다.
파리에는 19세기에 네 개의 큰 공동묘지가 조성됐는데 그 중 페르 라셰즈가 가장 크다. ‘동쪽 공동묘지’로도 알려진 이곳을 찾는 사람은 연간 350만 명이나 되니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네크로폴리스다. 이토록 많은 사람이 찾은 이유는 무엇보다도 먼저 유명한 인물들의 묘소가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묘소들이 고딕, 아르 누보, 아르 데코 등 다양한 예술 양식의 묘비와 조각들과 꽃으로 장식돼 있으니 ‘장례의 예술’의 전시장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따라서 이곳은 공동묘지라고 해서 산 자들의 세계로부터 죽은 자를 엄격히 격리해 놓는 엄숙하고 음산한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고, 다양한 형태의 볼거리와 산책로가 사람들을 발길을 끄는 것이다. 이렇듯 이 공동묘지는 처음부터 건축가에 의해 계획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그 뒤에는 나폴레옹이 있었다.
프랑스 혁명 기간에 영웅으로 떠오른 나폴레옹은 1804년 스스로 황제가 됐다. 그해 그는 모든 시민은 인종이나 종교와 관계없이 누구나 인간답게 묻힐 권리가 있다고 선포했다. 그 이전만 하더라도 신성한 곳으로 간주하던 기독교 교회 묘지에는 무신론자, 비기독교 신자,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은 절대로 묻힐 수 없었으니 나폴레옹이 이런 뿌리 깊은 종교적 관습을 타파한 것은 과히 혁명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건축가 알렉상드르-테오도르 브롱냐르(1739-1813)에게 예수회 수도원이 있던 자리에 17헥타르의 넓은 공동묘지를 조성하도록 했다. 페르 라셰즈라는 이름은 이 수도원의 수도사 프랑수아 드 라 셰즈(1624–1709)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건축가 브롱냐르는 묘소를 찾은 사람들이 나무가 늘어선 대로와 골목길을 따라 조용히 거닐 수도 있는 매력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조각 정원 같은 네크로폴리스를 만들었는데, 이것의 기존의 공동묘지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의 도시계획이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런 면에서 그는 나폴레옹만큼 혁명적이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페르 라셰즈가 파리 중심부에서 너무 멀어서 별로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첫 해 1804년에는 겨우 14기의 묘소만 들어섰다. 이에 이곳을 매력적인 장소로 탈바꿈시키려는 해결책이 나왔다. 즉, 유명한 사람들의 묘소를 이곳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먼저 시인 라 퐁텐과 극작가이자 배우였던 몰리에르의 묘소가 1804년 후반에 이곳으로 옮겨졌고, 1817년에는 12세기의 전설적인 두 연인 피에르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묘소가 이곳으로 이장됐다. 그 후부터 이곳은 유명한 인물들 가까이 묻히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돼 신청자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1830년에는 묘소가 자그마치 3만 3000기로 늘어났다. 이에 따라 공동묘지의 영역도 계속 확장됐으며, 지금은 이곳에 1백만 기가 넘는 묘소가 있다.
수많은 묘소 중에서 유난히도 많은 참배객의 발걸음을 이끄는 것은 쇼팽의 묘소이다. 참배객 중에는 꽃을 들고 온 여인들도 적지 않다. 특히 파리를 찾는 폴란드 사람들에게 이 묘소는 거의 성지와 다름없는 필수코스이기도 하다. 쇼팽의 묘소는 그의 연인이었던 조르주 상드의 사위인 조각가 클레징어에 의해 제작된 하얀 대리석상으로 장식돼 있는데, 리라 위에 몸을 구부리고 영원한 잠을 자는 쇼팽을 지켜 내려다보는 뮤즈 여신과 같은 모습이다.
결핵성 폐질환과 고투하면서 꺼져가는 불길 속에서도 최고의 작품을 창조했던 쇼팽은 1849년 10월 17일 39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그의 유해는 파리에서 가까이 지내던 예술계 친구들의 손에 의해 10월 30일에 이곳에 묻혔고, 그의 주검 위에는 그가 20세에 바르샤바를 떠날 때 친구들이 고국을 잊지 말라고 은으로 만든 용기에 담아줬던 폴란드의 흙이 뿌려졌다. 에펠탑이 세워지기 40년 전 일이었다.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culturebox@naver.com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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