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메타나 탄생 200주년과 서거 14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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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는 약 1000년 전에 블타바 강변의 언덕 위에 세워진 프라하를 중심으로 발전하다가 기원후 16세기 유럽의 중심지가 됐고, 그 후에는 약 300년 동안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면서 독일권에 완전히 편입됐다. 그러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에야 체코슬로바키아라는 국명으로 비로소 독립국이 됐다.
그 후 나치독일의 점령, 공산주의, 1968년 ‘프라하의 봄’, 1989년 벨벳 혁명 등을 거친 다음에는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나라로 조용히 갈라지는 등 여러 차례의 격동기를 거쳤다. 이러한 격동기 속에서도 수도 프라하는 아름다운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주옥같은 도시 프라하는 수준 높은 음악적 분위기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사실 프라하는 모차르트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보다 더 사랑했을 정도로 수준 높은 음악의 도시이기도 하다. 특히 올해는 일 년 내내 여러 고품격 음악회가 프라하의 주요 공연장을 중심으로 체코 전역에서 풍성하게 열리고 있는데, 2024년은 10년마다 찾아오는 ‘체코 음악의 해’다.
공교롭게도 체코를 대표하는 음악가들이 태어난 해, 또는 서거한 해는 4로 끝나는 해다. 게다가 올해는 스메타나 탄생 200주년이자 서거 140주년이며, 드보르작 서거 120주년인 것이다. 또 이 두 사람의 명성을 잇는 체코 음악가 야나첵(1854~1928)의 탄생 170주년이기도 하다.
그뿐 아니다. 체코를 대표하는 오케스트라 ‘체코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이 명칭으로 대중 앞에 처음으로 선보인 것이 1894년이니, 이 오케스트라도 올해 130주년을 맞는다. 따라서 체코는 10년마다 4로 끝나는 해를 ‘음악의 해’로 지정해 대대적인 음악제를 여는 것이다.
‘체코 음악의 아버지’는 단연 베드르지흐 스메타나(1824~1884)다. 그의 대표작은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 오페라 「팔려 간 신부」, 현악 4중주 「나의 삶으로부터」 등이 먼저 꼽힌다. 그가 태어난 곳은 프라하에서 약 160㎞ 동쪽에 위치한 리토미슐로 인구 1만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고 아담한 도시다.
리토미슐 시내 중심에서 약 5백 미터 동쪽 언덕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리토미슐 성이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 성에는 18세기 말에 만들어진 150석 정도의 아담한 바로크 양식의 극장이 눈길을 끈다. 바로 이 극장에서 1830년 10월, 여섯 살의 스메타나는 피아노 연주회를 열어 초대받은 귀빈들을 놀라게 했다.
그의 아버지는 리토미슐 성에 딸린 맥주 양조장 관리인이었다. 스메타나는 양조장 건물과 붙은 집에서 1824년 3월 2일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마추어 음악가로 현악사중주에서 연주하기도 했기 때문에 어린 스메타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음악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오스트리아 지배 아래에서 체코의 공용어는 독일어였기 때문에 스메타나의 아버지는 사람들과 어울릴 때만 체코어를 썼을 뿐이었다.
스메타나는 15세 때인 1839년에 학교를 수도 프라하로 옮겼고, 프라하에서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는 음악의 길로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 후 1848년 프라하에서는 민족주의에 심취된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오스트리아 정부군에 맞서 항전을 벌였는데 그는 이 봉기에 참여했다. 하지만 봉기는 실패로 끝났고 오스트리아의 무자비한 탄압만 몸소 겪었을 뿐이었다.
그 후 그는 자신이 체코 사람임을 더욱 절실히 느끼고는 음악에 체코 민족의 혼을 불어넣으면서 체코 음악을 좀 더 근대적으로 정착시키는 일에 앞장서기로 결심했다. 그는 독일어를 쓰던 체코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체코어 이해력이나 구사력은 한계가 있었겠지만 그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중부 유럽음악의 주류에 뿌리를 두고 체코의 역사, 영웅담, 전설, 민속 등과 같은 요소를 첨가시키거나 체코의 풍경을 표제로 하는 등 체코 음악의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그의 음악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체코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았으며 그들 마음속에 체코 민족주의 운동의 불길이 타오도록 했다. 즉 그는 체코 국민주의 음악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당시 유럽음악계의 황제 리스트는 그의 음악적 능력을 인정하고는 그를 ‘순수한 체코의 정신을 타고난 작곡가이며 신의 은총을 받은 예술가’라고 극찬했다.
하지만 음악가인 그에게 치명적인 재앙이 닥쳐왔다. 다름 아닌 청력장애였다. 그럼에도 그는 작곡을 멈추지 않았다.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는 상태에서 작곡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연작교향시 「나의 조국」이다. 여섯 곡으로 이루어진 이 교향시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곡 <비셰흐라트>와 <블타바 강>은 1874년에 작곡했고 나머지 네 곡은 그가 청력을 완전히 잃은 다음인 1879년에 완성했다. 그런데 침묵의 세계에서도 창작열에 불타던 그에게 운명의 신은 계속 가혹했다. 정신착란증까지 겹쳤던 것이다.
그는 1884년 5월 12일 프라하의 정신병동에서 60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는데 그의 모습은 매우 평온했다고 한다. 마치 운명의 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듯. 그의 시신은 모든 체코 국민의 애도 속에 블타바 강변 비셰흐라트 언덕 묘지에 안장됐다. 지금부터 꼭 140년 전의 일이었다.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culturebox@naver.com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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