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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년 기자 시절이던 1990년대 중반엔 어디 가서 노트북을 꺼내면 다들 쳐다보곤 했다. 그게 들고 다니는 컴퓨터라는 거냐 하고 묻던 시절이다. 요즘에 비하면 먹통에 가까운, 문서 작성과 전송 기능만 갖춘 컴퓨터였다. 그래도 짐짓 선택받은 사람인 양 아무데서나 그 무겁고 투박한 기계를 꺼내곤 했다. 어설픈 건방을 떨었던 것이다.
당시엔 기자란 직업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아서 동사무소든 음식점이든 들어가서 전화 좀 빌려 쓰자고 해도 박대당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전화가 아니라 전화선을 빌려 썼다. 인터넷이 없던 때 기사를 보내려면 전화선이 필요했다. 어느 날 다방에 들어가 주인 허락을 받고 카운터에 있던 전화기 꽁무니에서 케이블을 쑥 뽑았더니 주인이 깜짝 놀랐다. 그는 전화기에서 그 전선을 분리할 수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 것이다.
익숙한 솜씨로 케이블을 노트북에 연결하고 모뎀을 작동시키자 특유의 “삐~ 지지직” 하는 소리가 컴퓨터에서 흘러나왔다. 다방 주인이 걱정스러운 눈치로 물었다. “국제전화 요금 나오는 건 아니죠?” 조선 시대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말 빨리 돌아간다.
그때쯤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교수인 니컬러스 네그로폰테의 책 ‘디지털이다(Being Digital)’가 나왔다. 그는 물질의 기본단위인 원자(原子)와 디지털의 기본인 비트(bit)를 비교하며 디지털을 찬양했다. 도서관에 책이 물질 형태로 있을 때 누가 빌려가면 책장이 비어 있지만 디지털 형태라면 아무리 많은 사람이 빌려가도 책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식으로 설명했다(그렇게 해야 많은 사람이 알아듣던 시대다). 나를 포함한 당시 젊은 세대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디지털이 가져올 미래를 오직 휘황하게만 예견했다. 그리고 오늘날 디지털이 어떤 세상을 만들었는지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네그로폰테의 예측 이후 30년을 꾸준히 디지털 시대에 발맞춰 살아온 결과 나는 디지털이 여타 문명의 발명품처럼 이로운 만큼 해롭기도 한 도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컴퓨터와 스마트폰 덕분에 똑똑해진 것 같지만 사실 멍청해졌다. 음식 주문하는 키오스크 앞에서 무슨 버튼을 눌러야 하나 허둥대다가 “당신은 로봇입니까? 아래에서 버스 사진을 모두 고르시오” 하고 묻는 컴퓨터 화면을 보면 기분이 묘해진다. 이제 곧 인공지능이 그런 질문조차 없이 나를 판단하고 지시를 내릴 날이 올 것이다.
내비게이션이 자꾸 골목길로 들어가라고 한다. 따라가 보니 고작 1분 빨리 가게 하려고 주택가 이면 도로의 보행자와 유모차, 자전거들 사이로 차를 인도한다. 나는 내비게이션을 껐다. 그 길은 내가 잘 아는 길이다. 혹시 막힐 수도 있다. 그럴 것 같으면 일찌감치 나서면 된다. 일찍 도착하면 약속 장소 근처 거리와 사람을 구경하며 기다릴 수도 있다. 그것이 인간의 일이다. 나는 생각했다. 과거와 현재가 그랬듯이 미래도 디지털이 아니다.


한현우
신문기자 이력 30년 중 대부분을 문화부 기자로 글을 써왔다. 일간지 문화2부장, 논설위원을 거쳐 현재 문화전문기자로 일하고 있다.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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