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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기록부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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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고교 교사들은 ‘챗GPT’를 이용해 학교생활기록부를 쓴다고 한다. 생활기록부의 ‘행동 특성 및 종합 의견’을 주로 인공지능에 맡긴다는데 예를 들어 ‘성실함’, ‘예의 바름’, ‘착함’이란 단어를 입력하면 ‘수업에 대한 태도가 매우 바르고 진지하며 항상 성실하게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이라는 문장을 만들어준다고 한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어떤 학생을 두고 ‘성실함’, ‘예의 바름’, ‘착함’이란 평가를 하기가 어렵지 그런 단어들로 문장을 만드는 게 그렇게 힘든가. 교사들은 생활기록부를 쓰는 일의 방대함을 호소한다는데 한 사람의 평생을 따라다닐 문서를 컴퓨터에 맡기는 건 아무래도 스승의 책무에 소홀한 일인 것 같다.
그렇다고 과거의 교사들이 밤을 새워 제자들의 지난 1년을 회고하며 문장을 써내려갔느냐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나를 포함해 세 명이 심하게 장난을 치다가 담임에게 걸렸다. 몽둥이로 엉덩이 10대씩을 맞은 우리는 모두 교무실로 불려가 반성문을 썼다. 그때 담임이 나에게 말했다. “네가 나쁜 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렇지만 너는 첫인상이 안 좋으니까 조심해.” 그 말을 하던 담임의 표정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런가 하면 고3 담임은 졸업을 앞두고 나를 교무실로 불러 우리 반 아이들의 생활기록부를 쓰라고 했다. 글씨를 잘 쓴다는 이유였다. 그러면서 8절지 한 장을 내밀었는데 거기엔 약 100가지의 ‘학생 평가 범례’가 인쇄돼 있었다.
담임은 누구에게 몇 번 문장을 쓸지 이미 정해서 연필로 적어놓았고 나는 그 문장을 범례에서 찾아 펜으로 옮겨 썼다. 인공지능은커녕 손글씨로 생활기록부를 쓰던 시대에도 교사들은 예시문을 베꼈던 셈이다. ‘챗GPT’의 아날로그 판이라고나 할까.
담임은 자신의 일을 대신하게 한 대가인지 내게는 좋은 문장을 골라놓았다. 그 문장을 내 생활기록부에 써넣으려 할 때 나는 봤다. 1학년 때 담임이 내 생활기록부에 뭐라고 썼는지. 그곳엔 ‘이러쿵저러쿵하지만 사회성 훈련이 필요함’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범례에도 그와 똑같은 문장이 있었다. 부정적 평가조차 머릿속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다.
나는 그때부터 우리 반 아이들의 생활기록부를 모두 훑어나갔다. 전교 꼴등 하던 친구도, 맨날 싸움질하던 녀석도, 결석을 밥 먹듯 하던 아이의 생활기록부에도 ‘사회성 훈련’ 운운하는 부정적 문장은 없었다. 그때 생활기록부는 대입 자료가 아니라 격려가 담긴 덕담을 적는 기록물 성격이 강했다.
다행히 나는 고교 졸업 후 이제까지 사회성 부족으로 외톨이가 되거나 부적응자가 될까봐 걱정한 적은 없었다. 어쩌면 고1 때 담임이 쓴, 아니 베껴 쓴 그 문장이 일종의 액땜이 됐는지도 모른다.
요즘 교사들이 생활기록부 앞에서 머리 쥐어뜯는다는 기사를 읽으며 그 짧은 문장이 어떤 사람의 삶에는 무척 깊은 흔적을 남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한현우
신문기자 이력 30년 중 대부분을 문화부 기자로 글을 써왔다. 일간지 문화2부장, 논설위원을 거쳐 현재 문화전문기자로 일하고 있다.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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