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자…아프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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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는 매일 나 홀로 있었지
아버지는 택시 드라이버
어디냐고 여쭤보면 항상 양화대교
아침이면 머리맡에
놓인 별사탕에 라면땅에
새벽마다 퇴근하신 아버지 주머니를 기다리던
어린 날의 나를 기억하네
엄마 아빠 두 누나
나는 막둥이 귀염둥이
그날의 나를 기억하네 기억하네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래 그래
내가 돈을 버네 돈을 다 버네
엄마 백원만 했었는데
우리 엄마 아빠 또 강아지도
이젠 나를 바라보네
전화가 오네 내 어머니네
뚜루루루 아들 잘 지내니
어디냐고 물어보는 말에
나 양화대교 양화대교
엄마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좀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래 그래
그때는 나 어릴 때는
아무것도 몰랐네
그 다리 위를 건너가는 기분을
어디시냐고 어디냐고 여쭤보면
아버지는 항상 양화대교 양화대교
이제 나는 서있네 그 다리 위에
그 다리에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래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래 그래
(2014년, 작사 자이언티/작곡 자이언티·쿠시 등)
“제게 양화대교는 아버지를 뜻합니다. 아버지가 걸어간 ‘가장’이란 길을 이어받아 저도 같은 위치에 서서 느낀 가족의 얘기입니다. 이 노래를 젊은 가장들과 모든 가족에게 바칩니다.”
자이언티의 아버지는 택시 운전사였다.
“제가 어릴 때 열쇠 간수를 잘못해서 집에 가면 문을 못 열어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오곤 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면 아빠한테 전화하라고 하셨고, 아빠한테 전화하면 양화대교에 계신다고 했다. 엄마는 저녁 준비를 마치면 아빠에게 전화하라고 하셨는데, 그때도 양화대교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집에 거의 다 왔다는 이야기를 양화대교에 있다고 대신하신 것 같다. 아버지는 새벽까지 일하고 오실 때도 있었다. 내가 라면땅이나 별사탕 같은 걸 좋아해서 늘 자고 있던 내 옆에 과자봉지를 두곤 하셨다.”
“나도 가수로 활동하면서 돈을 벌었다. 갈수록 아버지가 버는 것보다 더 벌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가장이 된 기분을 느끼게 되면서 이런 노랫말을 썼다. 엄마가 연세가 좀 있다. 몸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그래서 엄마에게 ‘아프지 말고’라는 말을 자주 했다.”
자이언티는 2011년 데뷔했으나 거의 무명에 가까웠다. 2014년 자작곡 ‘양화대교’로 홀연히 존재를 강렬하게 내뿜은 후 언론 인터뷰에서 한 이야기다.
노래는 상당히 독특하다. 랩인지 노래인지 높낮이가 없다. 그냥 리듬을 타면서 툭툭 내던지거나 읊조린다. 뮤직비디오의 영상은 꽤 세련됐고 인상적이다. 희거나 검은 양복에 중절모를 눌러 쓰고 도시의 불빛이 영롱하게 반사되는 양화대교를 걸으며, 또는 택시 안에서, 콘서트홀에서 혼자 노래한다. 다른 출연자는 없다. 외로워 보이기도 하고 단단해 보이기도 한다.
‘양화대교’ 노랫말은 단순하다. 깊이 생각하고 곰곰이 씹어봐야 하는 어려운 문장도 아니고 문학적 조탁도 없다. 어쩌면 초등학생이 생각나는 대로 일기장에 쓴 글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 천진난만하고 단순무구함이 가슴을 두드린다.
가사에는 그냥 우리네 보통 가정의 삶의 모습과 무게가 묻어있다. 가장은 새벽까지 운전대를 잡고 돈을 번다. 가끔 집에 혼자 있는 아들과 통화한다. 어디냐 물으면 “양화대교”라고 말하는데 그건 거의 다 집에 왔다는 말이다.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하고는 잠자는 어린 아들 머리맡에 비록 라면땅 별사탕이라도 놓아줄 때 아비는 행복했을 거다. “엄마 백원만” 하던 막둥이 어린 아들은 이제 성장해서 돈을 번다. 아버지가 돈을 벌기 위해 건너가고, 또 그날의 돈을 벌어 건너오던 그 다리에 서서 비로소 이곳을 오가던 아버지의 고단함을 생각한다. 어릴 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런데 내가 큰 만큼 부모는 늙어갔다. 할 수 있는 최고의 말은 이것이다. “아프지 마, 이제 우리 행복하자.”
노래는 아버지와 엄마, 두 누나, 강아지와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며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는 다짐을 반복하고 반복한다. ‘행복하자’는 문법적으로는 틀린 말이다. (형용사에 ‘하자’나 ‘합시다’ 같은 청유형이나 명령형 어미를 붙일 수는 없다.) 그런데 어법에 맞지 않는 ‘행복하자’는 이 말이 거슬리지 않으면서 울림을 준다. 다짐이지만 연민과 슬픔을 자아낸다. 빨리 부자가 돼서 행복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아프지만 않으면 된다.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이 직설적이고 현실적인 아홉 글자는 그 어떤 시어보다도 강하다.
‘양화대교’는 개인사를 담은 보기 드문 노래다. 꾸밈이나 상상이 아닌 개인적 체험은 전염력과 공감력이 있다. 다들 고만고만하게 살아온 시대였다. 그래서 아버지 어머니 가족이 있는 사람이라면 노래를 들으며 자신도 양화대교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노래의 가장 큰 힘은 ‘공감’과 ‘위로’다. 찬찬히 듣고 있자면 왠지 가슴이 뭉클해지고 한쪽이 저려온다,
다리가 아닌들 어떠랴. 도시의 골목길이면 어떻고 지하철역, 버스 정류장, 논둑길이면 어떠랴. 아버지는 삶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그 길을 걸어왔고 이제 내가 아버지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 걷는다.
자이언티는 이 노래 하나로 무명생활을 떨치고 삶도, 음악 인생도 완전히 바뀌었다. 그해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노래’와 ‘최우수 알앤비 노래’ 2개 부문 후보에 올라 ‘최우수 알앤비 노래’상을 받았다. 발표 한 해 뒤인 2015년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에 출연하면서 대중적 인지도도 높아졌다.
어느 날 비행기 안에서 부모를 생각하며 30분 만에 작사 작곡했다는 이 노래는 우선 제목부터가 실재하는 다리 이름이어서 생경했다. 한강에 놓여진 25개 ‘대교’ 가운데 하필 왜 양화대교일까.
양화대교의 첫 이름은 1965년 개통한 ‘제2한강교’였다. 광복 후 우리 기술로 만든 첫 다리이자 한강에 두 번째로 놓인 다리였다. 1982년 서울 서남부의 폭주하는 교통량으로 다리 하나가 나란히 더 세워지면서 근처 나루터인 양화진의 이름을 따 양화대교(楊花大橋)로 개명됐다. 초창기에는 강북(합정동)과 영등포, 양평동, 당산동, 문래동, 구로공단과 멀리로는 김포국제공항, 부천, 부평, 인천을 잇는 서울 서부의 유일한 관문이었다.
당시 서울 강남의 서쪽은 서울이면서도 서울을 비껴간 듯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지금은 비싼 아파트와 고층빌딩이 즐비하지만 공장에서 돈 벌러 상경한 이들이나 도심에서 밀려난 이들이 많이 거주했다. 완행열차를 타고 시골서 올라와 처음 서울 땅을 밟는 곳도 영등포역이었다.
자이언티 가족은 강서구 쪽에 살았다. 가수의 아빠는 양화대교를 건너 합정과 신촌을 지나 서울 도심 진짜 서울에서 돈을 벌고 다시 다리를 건너 남쪽 집으로 돌아왔을 게다. 또는 한강의 같은 남쪽이지만 확연히 냄새가 다른 신흥 강남에서 부자들을 태웠을 게다. 젊은 노동자 아버지의 과거와 그만큼의 나이가 든 아들의 현재가 만나는 지점이 바로 양화대교다.
양화대교는 이제 젊음과 문화와 언더와 트렌드의 거대한 용광로인 홍대 문화권의 관문이 됐다. 홍대 앞의 비싼 임대료를 버티지 못해 뻗어나간 합정, 망원, 연남, 상수를 포괄하고, 강 건너 젊은이들이 일하고 독특한 색깔을 가진 문래동 양평동 구디(구로디지털단지)를 이어준다. 양화대교는 문화의 출구이자 입구다.
노래 제목이 된 한강 다리는 몇 되지 않는다. 혜은이의 ‘제3한강교’(1979년, 지금의 한남대교)와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1985년)가 가장 히트했다. 다리 아래 강물처럼 흘러가는 사랑과 이별과 다짐을 노래했지만, 노랫말에는 왠지 ‘강남스러운’ 쾌락과 허무의 냄새가 배어있다. ‘양화대교’는 그런 노래와 완전히 다른 세계다.
자이언티는 유니크한 싱어송라이터이자 마치 기계음 같은 독특한 보컬을 지녔다. 그 후의 노래에서도 속삭이듯 하지만 시크한 감성으로 현실을 노래하며 젊은이들에게 힐링을 주었다. ‘양화대교’ 다음으로 2015년 발표한 ‘꺼내 먹어요’에서는 “배고플 땐 이 노래를 아침 사과처럼 꺼내 먹어요”라며 일상과 사랑과 이별에 지친 이들을 위무했다. 발표한 노래마다 음원을 장악해 ‘음원깡패’, ‘음색깡패’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본명이 ‘김해솔’인 그는 33세다. 어머니는 목사였다. 예명(Zion.T)은 예루살렘 언덕인 시온(영어로는 Zion, 자이언)에 십자가를 형상화한 T를 합친 것이다.
그는 ‘양화대교’의 음원 수익으로 아버지에게 양화대교 근처 상수동에 멋진 카페를 차려드렸고, 어머니에게는 고급 승용차를 선물했다. 아버지는 더는 택시를 운전하지 않는다.
◆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과 신문윤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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