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보다 노랫말 짓기가 훨씬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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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훈씨! 이제! 우리 인생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영훈씨의 음악들과 영훈씨를 기억하기 위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당신의 노래비를 세웁니다. 영훈을 사랑하는 친구들이. 2009. 2. 14.”
이날은 대장암으로 투병하다 47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문세의 영원한 음악적 파트너 이영훈의 1주기를 맞는 날이었다.
노래비는 그가 작사·작곡한 ‘광화문 연가’ 가사에 나오는 조그만 교회당(정동제일교회) 맞은편에 세워졌다. 아날로그 마이크 모양의 조각 아래 그의 얼굴이 새겨졌고 아랫단 양쪽에는 ‘광화문 연가’ 노랫말과 대표곡 목록이 써졌다.
서울시가 허가하고 건립 지원을 한 최초의 대중문화 노래비다. 개막식에는 이문세가 나와 노래했고 많은 동료 가수와 오세훈 시장이 참석했다. 이영훈이 생전에 사랑했던 곳에 노래비를 세워주며 사람들은 그를 그리워했다. 작곡가에게 이만한 축복이 어디 있을까. 명동에 대한 노래도 적지 않지만 명동에 가수나 작곡가의 노래비는 없다.
고인의 아들 이정환 군은 “광화문 돌담길에 아버지가 쓴 수많은 서정시의 흔적이 영원히 남게 돼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 노래비를 보고 ‘광화문 연가’를 불러주고 추억하면 여러분과 내 마음속에 아버지가 영원히 계실 것”이라며 유족을 대신해 인사했다.
그가 떠난 지 3년 후인 2011년 그가 ‘맘마미아’를 보고 구상했던 뮤지컬 ‘광화문 연가’가 세종문화회관에 막을 올렸다. 2021년에 세 번째 시즌까지 나왔다. 대중음악 작곡가를 위한 헌정 공연 또한 처음 있는 일이다. 그를 사랑한 많은 가수들이 무보수로 출연해 노래했다.
“1985년 킹레코드라는 녹음실에서 아르바이트로 밴드 피아노 반주를 하고 있었는데, 신촌블루스의 엄인호씨가 어떤 가수가 작곡가를 구한다며 나를 소개시켜 주었어요.” (이영훈 생전 인터뷰)
“굉장히 수줍어하는 그에게 곡을 좀 들려 달라고 했어요. 그가 마지못해 피아노를 연주하는데 첫 멜로디가 내 심장을 쳤죠. 그 노래가 ‘소녀’입니다. 나한테 곡을 줄 수 있느냐고 묻자, 자기는 아마추어여서 히트도 안 될 거라며 겸연쩍어했어요.” (이문세)
1977년 데뷔한 이문세는 1집과 2집을 냈지만 가수보다는 라디오 DJ로서 이름을 얻고 있던 시절이었다.
두 사람은 곧 의기투합해 서울 수유리 자취방에서 밤을 새우며 작업했다. 6개월 동안 8곡을 완성한 이영훈은 ‘쉬운 노래를 하나 만들어 보겠다’고 하더니 30분 만에 한 곡을 만들었다. 그 곡이 바로 3집 앨범(1985년)의 대표곡으로 큰 사랑을 받고 이영훈의 이름을 음악계에 처음 알린 ‘난 아직도 모르잖아요’다.
이영훈의 위대함은 작곡 이상으로 작사에 있다. 그는 시적 감성이 풍부한 뮤지션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사에 공을 많이 들였다. 노랫말 짓기가 선율 만들어내는 것보다 50배는 어려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격’이 있는 가사를 썼다. 눈물, 한숨, 허무, 자기연민, 감정 과잉을 걸러내고 담담하게 사랑과 이별, 상실과 그리움의 정서를 담아냈다. 시적이면서도 회화적이었다. 그의 노랫말을 따라 부르다 보면 한 폭의 풍경화 속 주인공 같은 느낌이 든다.
‘광화문 연가’와 같은 5집 앨범(1988년)에 실린 ‘시를 위한 시’에는 이런 아름다운 가사가 있다.
“내가 눈 감고 강물이 되면 그대의 꽃잎도 띄울게/내가 눈 감고 바람이 되면 그대의 별들도 띄울게”
또다시 읊고 싶은 노랫말들이 많다.
“라일락 꽃향기 맡으면/잊을 수 없는 기억에/햇살 가득 눈부신 슬픔 안고/버스 창가에 기대 우네/…/이렇게도 아름다운 세상/잊지 않으리, 내가 사랑한 얘기”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저 타는 노을 붉은 노을처럼/난 너를 사랑하네/이 세상은 너뿐이야 소리쳐 부르지만/저 대답 없는 노을만 붉게 타는데” (‘붉은 노을’)
“혼자 걷다가 어두운 밤이 오면/그대 생각나 울며 걸어요/그대가 보내준 새하얀 꽃잎도/나의 눈물에 시들어 버려요/그대가 떠나가면 어디로 가는지/나는 알 수가 없잖아요” (‘난 아직 모르잖아요’)
“이대로 떠나야만 하는가/너는 무슨 말을 했던가/어떤 의미도 어떤 미소도/세월이 흩어가는 걸” (‘그녀의 웃음소리뿐’)
작사가 김이나는 가장 좋아하는 가사로 ‘옛사랑’을 꼽은 적이 있다. 평단으로부터 “시와 선율이 하나가 된 예술 작품”이라고 평가받은 노래다.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내 맘에 둘 거야/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난 대로/내버려두듯이/흰 눈 나리면 들판에 서성이다/옛사랑 생각에 그 길 찾아가지/광화문 거리 흰 눈에 덮여가고/하얀 눈 하늘 높이 자꾸 올라가네”
이영훈은 “이 가사를 쓰고 난 후, 더는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이 곡 이후에 쓴 내 노래의 가사들은 모두 별첨 정도일 뿐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클래식 악기와 작법이 가미된 ‘한국적 팝 발라드’(전편 ‘광화문 연가’ 참조)를 만든 그의 손에서 나온 노랫말들은 노래 못지않게 클래식하다. 마치 피아노로 쓴 가사 같다.
거기에 이문세라는 보컬리스트의 독보적 음색과 기교를 절제한 창법이 덧입혀지면서 그 당시 팝에 비해 홀대받던 대중가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이다.
“음악이란 인간의 가장 깨끗한 상태의 영감에서 이루어질 뿐이다. 논리와 방법이 만든 음악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쓰레기일 뿐이다.” (생전 인터뷰)
이영훈은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문세보다 한 살 어리다. 아버지는 그의 음악을 반대해 기타를 부숴버린 엄격한 교사였으나 어머니는 아들의 음악적 자질을 알고 피아노를 사줬다. 그 피아노로 중학생 때 나중에 히트곡이 된 ‘사랑이 지나가면’, ‘소녀’를 작사·작곡했다고 한다. 그는 서라벌고를 졸업한 후 정규음악 수업을 받지 않고 독학으로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만들었다.
자신의 가사에 ‘광화문’이 자주 등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제 감성의 출발은 광화문과 덕수궁입니다. 워낙 궁 같은 분위기를 좋아하니까 어릴 때부터 광화문 주변을 자주 찾았고 그곳에서 감성을 키웠어요”라고 말했다.
이영훈-이문세는 한국 대중가요사상 서로에게 최고의 페르소나다. 1985년 정규 3집 앨범부터 중간에 잠시 헤어진 적은 있으나 17년 동안 함께 했다. 이문세의 거의 모든 히트곡은 이영훈 작사·작곡이다.
유족에 따르면 이영훈은 강박에 가까운 태도로 작곡했다. 종일 피아노 앞에만 앉아 커피 40잔, 담배 4갑을 피우며 밤을 새웠다고 한다. 그런 습관이 건강을 해쳤다.
이영훈이 암 판정을 받은 뒤에도 이문세는 그의 건강 상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영훈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상태를 어느 정도 감추었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 이문세는 그의 손을 잡고 기도하며 배웅했다.
이영훈의 노래들은 30년이 흘렀어도 전혀 올드한 느낌이 없다. 라디오에서, 노래방에서, 노래 경연 프로그램에서 꾸준히 들리고 불린다. 수많은 후배 가수가 커버했고 리메이크했다. 그래서 그의 부재가 실감 나지 않는다.
그가 떠난 지 16년. 모든 게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해가고,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겠지만, 그는 여전히 ‘좋은 노래’를 사랑하는 이들 곁에 남아 있을 것이다.
◆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과 신문윤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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