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제안하면 정책이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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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내장 실손보험금 지급기준 완화, 전자등기증명서 발급 수수료 면제, 시골 버스정류장 전등 설치...
2023년 초 만 18세를 넘긴 고3 아들을 둔 엄마는 더 이상 ‘저소득한부모가족 아동양육비’를 지원받을 수 없게 됐다. 생일이 빠른 아들은 여전히 고등학생이지만 지급 대상 범위가 만 18세 미만으로 규정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해 말 상황이 반전됐다. 정부가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자녀는 만 18세가 되더라도 아동양육비를 계속 받을 수 있도록 개선했기 때문이다.
2022년 미용사 국가자격시험 실기에서 탈락한 A씨는 재도전을 위해 어떤 항목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총점만 확인할 수 있고 항목별 점수는 공개되지 않는다는 답을 받았다. 2023년 12월, 미용사 등 실기시험 항목별 수험자 백분위, 합격자 평균 점수 등을 공개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추진됐다. 덕분에 A씨처럼 재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이 힘을 얻을 수 있게 됐다.
이들 모두 국민제안의 결과다. 국민제안은 2022년 6월 23일 대통령실 누리집에 개설된 국민소통 창구다. 국민의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정책에 반영하겠다는 취지로 만들었다. 개설 이후 2023년 6월까지 1년 동안 집계된 국민제안 신청 건수는 6만 4000여 건. 그중 60건이 정책화 과제로 선정됐고 16건은 정책화를 마쳤다.
국민제안(제안·민원·청원)이 접수되면 소관기관이 1차 검토 및 답변을 한다. 이어 대통령실이 정책화 검토대상과제를 발굴한다. 그다음 소관기관의 협의와 정책화 과제 정제, 국민제안 심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최종 추진과제가 선정된다. 이후 관련 규정 개정 등을 토대로 정책화되는 순이다.
3월 15일 용산 대통령실 파인그라스에서는 ‘국민제안 우수제안자 오찬 간담회’가 열렸다. 이날 간담회는 ‘국민제안에 참여한 모든 국민에게 감사드린다’는 취지로 대통령실이 마련했다. 국민제안 우수제안자 15명, 우수제안 담당 공무원 및 적극행정(불합리한 규제개선 등 공공의 이익을 위해 창의성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행위) 공무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제안을 내놓게 된 배경과 정책화 이행 현황 등에 관한 대화가 오갔다.
국민제안 주요 키워드는?
국민제안에 올라온 주요 내용은 자동차 우회전 교통사고, 전세사기, 학교 폭력 등으로 사회적 화두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2023년 2분기(4~6월) 기준 국민제안의 주요 키워드는 ‘저출산’, ‘오염수’, ‘자동차’, ‘선생님’, ‘운전자’ 등이었고 1분기(1~3월)에는 ‘코로나’, ‘피해자’, ‘경찰서’, ‘중국’, ‘부동산’ 등이었다.
현재까지 정책화된 국민제안의 분야는 크게 ▲생활불편 해소 ▲공정 ▲청년 ▲취약계층 ▲육아·청소년이다. 생활불편 해소의 경우 백내장의 예를 들 수 있다. B씨는 ‘백내장 3단계’를 진단받고 백내장 수술을 한 뒤 보험금을 청구했으나 보험사 측 의료자문에서 ‘백내장 1단계 및 시력교정 목적의 수술’로 판단받아 보험금을 받지 못했다. C씨 또한 주치의 판단에 따라 백내장 수술을 받고 보험금 지급을 요청했으나 보험사가 요구한 ‘제3자를 통한 의료자문’을 거부해 보험금을 받지 못했다. 정부는 이러한 국민제안 내용을 토대로 2022년 12월 ‘백내장 수술보험금 지급기준 정비’를 정책과제로 선정,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과 보건당국의 협의를 거쳐 백내장 실손보험금 지급기준 정비 방안을 마련했다.
제안자인 C씨는 이번 ‘국민제안 우수제안자 오찬 간담회’에도 참석했다. C씨는 간담회에서 “병원에 내원한 경위, 수술 전 받은 검사 항목, 8시간 동안 입원한 기록 등 보험사가 요청한 세부 자료를 제출했지만 보험사가 추가로 요구한 제3자 의료자문 동의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보험금을 받지 못했다. 환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진료한 전문의의 판단이 우선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험사가 배정한 제3자에게 의료자문을 받아야만 보험금 지급이 가능한 것은 부당하다”며 국민제안의 배경을 설명했다.
‘소유자 본인의 전자등기사항증명서 발급 수수료 무료화’의 단초를 제공한 제안자 성지훈 씨도 참석했다. 성 씨는 “부동산 등기사항증명서를 온라인으로 발급받으려면 수수료 1000원을 납부해야 한다고 해 의아했다. 여타 공적증명서의 온라인 발급 수수료는 무료인 반면 부동산 등기사항증명서는 수수료를 부과하는 것이 형평성에 맞는지, 시대 흐름에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더 찾아보니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 당시 ‘석열씨의 심쿵약속’ 중 하나로 ‘온라인 부동산 등기부등본 열람·발급 무료화’를 약속했다”며 국민제안의 계기를 밝혔다. 해당 국민제안은 법원이 ‘등기사항증명서 등 수수료규칙’을 개정해 소유자 본인의 전자등기사항증명서 발급 시 수수료를 면제하는 계기가 됐다.
정책화 이행 중에 있는 국민제안의 제안자들도 자리했다. D씨는 경력증명서 발급 유효기간의 연장 또는 폐지 방안을 제안했다. 경력증명서 발급 시점을 기준으로 이전과 달라진 사실이 없는데도 채용 공고 시 ‘3개월 이내 발급한 경력증명서’를 요구해 구직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게 골자다. D씨는 “청년 변호사들은 다른 업종보다 이직이 빈번하고 다니던 법률사무소가 폐업하는 경우도 있다. 대체로 서류 보관기관이 3년이다 보니 그 이전의 경력증명서를 떼는 게 불가능할 때도 있다. 이런 문제를 시정해달라는 제안을 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경력증명서 발급 유효기간을 연장하거나 폐지할 수 있도록 공정채용 컨설팅·교육 등을 지원할 계획이다.
원종섭 씨는 ‘법인명의 회원권에 대한 관리·감독 강화’를 제안했으며 이에 대해 정부는 업무와 무관한 지출이 법인 비용에 포함되지 않도록 법인 대상 안내 내용을 구체화하고 혐의 사업자를 추출해 법인세 성실신고를 유도하는 등 세원관리를 강화할 방침이다. 원 씨는 “1월부터 고가 법인 차량은 연두색 번호판을 부착하도록 되지 않았나. 고급 콘도·골프장 회원권도 철저한 감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혁신제품 아이디어 제안도
토론 주제 제안자와 혁신제품 아이디어 제안자의 발언도 이어졌다. 2023년 8월 1일부터 21일까지 국민제안 누리집을 통해 ‘자동차 배기량 기준 개선’ 관련 토론이 진행됐는데 이 또한 국민제안에서 비롯된 것이다. 해당 제안자는 “남편과 사별하고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라며 “20년이 다 돼가는 남편의 차를 쓰고 있는데 배기량이 2500㏄라는 이유로 한부모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배기량만 보지 말고 차의 연식과 가격으로 심사해달라는 제안을 하게 됐다”며 제안 취지를 밝혔다. 국민참여토론의 결과 응답자의 86%가 ‘배기량 중심의 자동차 재산기준 개선’에 찬성함에 따라 정부는 기초생활 보장·장애인 복지·한부모가족 지원제도의 수급 자격 산정 시 적용되는 배기량 상한을 완화할 것이라는 계획을 전했다.
‘야간버스 무정차 통과 방지를 위한 버스 승강장 승차등’은 혁신제품 최종 아이디어로 선정됐다. 제안자는 “시골은 해가 지면 도로가 더 어두워진다. 그런 도로에 버스 정류장이 있으면 기사님들이 대기 승객을 못보고 지나치는 경우가 종종 생기더라”며 “정류장 위에 전광등을 설치해 승차 예정인 승객들이 벨을 누르면 등이 켜지는 방안을 제안했다”고 발표했다.
제안자들은 공통적으로 “국민제안이라는 창구가 문제 해결은 물론이고 사회적 인식개선의 발판이 돼주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제안이 누군가의 일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었다는 데 뿌듯함을 느낀다는 제안자도 많았다.
이근하 기자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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