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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적 재현을 초월한 그림 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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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충현, ‘여름의 끝 3’, 캔버스에 유채, 115×115cm, 2013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생존 화가는 누굴까? 아마도 대답은 두 사람으로 압축될 것이다. 영국 출신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1937~)와 독일 출신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1932~)로.
굳이 전문성과 대중성이란 잣대로 구분하자면 미술전문가들은 리히터를 꼽을 테고 호크니는 일반인들로부터 인기가 많을 것이다. 두 작가는 80대 중반이 훌쩍 넘었지만 나이가 무색하게 지금도 왕성히 활동한다. 그림뿐 아니라 판화, 사진, 영상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든다. 그래서 그들을 ‘화가’로만 규정하기엔 부족하다.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화가들은 오래전부터 과학기술, 즉 테크놀로지를 활용했다. 거울과 렌즈가 대표적인 예다. 1839년 사진술 발명이 공인되면서 그림의 위상은 크게 변했다. 20세기 디지털카메라 등장은 픽처 역사에 결정적 전환점이 됐다.

▶노충현, ‘산책’, 캔버스에 유채, 162×227cm, 2013 

사진의 객관성 너머 그림의 상호주관성
이처럼 사진이라는 테크놀로지가 화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대단하다. 지금도 화가들은 그림을 그릴 때 사진을 활용한다. 기계(카메라)로 기록한 사진은 객관적이다. 반면 사람(화가)이 손으로 그린 그림은 주관적이다. 사진과 그림이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화가 노충현도 사진을 보고 그린다. 그렇지만 사진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회화 특유의 고유한 감성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호크니는 이렇게 말했다. “테크놀로지는 항상 미술에 공헌해 왔다. 붓 자체가 테크놀로지의 일종이 아닌가? 하지만 도구가 픽처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픽처를 만드는 것은 언제나 인간이다”라고. 이런 의미에서 그의 그림은 인간적인 체취가 물씬 풍기는 픽처의 전형이다.
얼핏 보면 ‘사진처럼 잘 그린’ 구상회화로 보인다. 틀린 말은 아니다. 애초 사진을 보고 그렸기에 어느 정도 사실성에서 벗어날 순 없다. 중요한 건 객관성이 아니다. 그것을 넘어선 화가의 주관적 시선이다. 더불어 붓과 물감을 다루는 솜씨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지점이 바로 여기다. 노충현은 캔버스에 유화물감을 다루는 기본기에 충실한 작가다. 붓 놀림은 메마른 듯 거칠다. 물감을 두텁게 중첩해서 채색하는 여느 유화작품과 달리 아주 얇게 칠해서 그렇다. 오히려 물감 자국 하나하나가 뚜렷이 드러난다. 무심한 듯 끄적끄적 칠한 것 같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이유 없이 지나간 붓질은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된다. 사진과 다른 회화의 매력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노충현, ‘편의점’, 캔버스에 유채, 112×145.5cm, 2013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뭔가 특별
그림의 주요 무대는 서울 망원동 한강 둔치 일대. 야외 수영장, 테니스장, 컨테이너, 편의점, 산책길, 그리고 강변북로 아래 토끼굴 등이 자주 등장한다. 최근엔 작업실이 있는 모래내 홍제천에서 한강 성산대교까지 이어지는 천변 풍경을 그렸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뭔가 특별하다.
하릴없이 어슬렁거리듯 산보하며 바라본 그림 속 세상은 재현 너머의 세계다. 눈에 보이는 것을 초월한 느낌과 정서에 대한 기록이다. 화가의 남다른 시선으로 포착한 장소의 흔적, 감정의 흔적, 시간의 흔적이다.
작품 ‘여름의 끝 3’이 불현듯 떠오른 이유는 짐작대로다. 호우로 피해를 본 수해 현장 사진을 봤기 때문이다. 제목처럼 ‘여름의 끝’을 보여주는 쓸쓸하고 축축한 풍경이다.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접힌 파라솔, 물이 빠지고 난 후에 남아있는 진흙, 널브러진 장비들….
물 빠진 후 한강 야외 수영장을 그린 이 그림은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이런 적이 처음이 아니다. 해마다 장마철 무렵 비슷한 사진을 보면 자동 반사적으로 이 그림이 생각난다. 앞서 사진은 객관적인 매체라 했다. 그렇다면 노충현 그림은 주관적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나의 주관과 겹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풍경 이면의 이야기들. 이런 점에 비추어 보더라도 그의 그림은 사진이 보여주는 맹목적인 객관성이 아닌 상호주관성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객관성의 다른 이름이 상호주관성이다.
노충현은 1970년 태어나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조형예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준희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_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 




[자료제공 :icon_logo.gif(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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